숨어있던 밤비, 바다로 가다 

유재연 2026. 4. 25. 09:4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귤밭의 개들] (5) ‘구멍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이 연재는 소설가 유재연이 제주 곳곳에 있는 개들의 삶을 기록하는 글입니다. 도시의 반려견 담론에서 비껴난 이름없는 개들-밭지킴견, 유기견-이 어떤 하루하루를 견디고 어떤 계절을 지나는지 세심하게 담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존재들의 삶에 잠시 머무르는 일, 그로 인해 제주라는 공간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일. 그 작은 감응이 독자들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 편집자 글
숨기만 하던 밤비. ⓒ 유재연

*

처음 만났을 때 밤비는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된 조그마한 강아지였다. 연한 베이지색 털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새까만 눈. 내가 다가가면 개집과 철조망 사이의 좁은 구석으로 숨었다. 몸을 움츠리고, 꼬리를 엉덩이에 찰썩 붙였다. 

어린 강아지가 혼자 밖에 묶여 있는 것이 안쓰러워 나는 매일 들렸다. 하지만 밤비는 나만 보면 숨었다. 주인 아저씨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 넘게 밤비는 겁에 질려 있었다. 엄마 개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는 그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모를 테니까.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산책줄을 보고 환하게 웃는 밤비, 들판에 처음 나온 밤비, 기어서 흰돌이에게 다가가는 밤비. ⓒ유재연

*

어릴 때 나는 겁 많고 잘 숨는 아이였다. 장롱 속에, 책상 밑에.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마주치면 주차된 차 뒤에 숨었다. 책 속으로도 숨었다. 어릴 때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현실 세계가 가짜이고 책 속 세상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일학년 교실에서 반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소년소녀판 '로빈슨 크루소'를 펼치고 무인도로 들어갔다. 언제 내가 책 바깥으로 나왔는지, 친구들과 인사를 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와 노는 밤비, 산책하는 밤비. 목장개 우도(맨 위), 우도의 동생 동동이(두 번째 사진 왼쪽), 우동이(두 번째 사진 오른쪽). ⓒ최은창 방끗사진관 대표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다가가자 밤비는 꼬리를 흔들며 반겨줬다. 주인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 밤비와 산책을 나갔다. 밤비는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이내 신이 나서 따라왔다. 넓은 들판에 풀어놓자, 밤비는 환희에 차서 뛰어다녔다. 밤비의 눈은 별처럼 빛났고, 네 다리는 하늘로 튀어오를 것 같았다. 
밤비와 우동이(오른쪽). ⓒ최은창 방끗사진관 대표

*

나는 어른이 되고도 잘 숨었다. 이십대엔 글쟁이가 되겠다며 일 년 정도 방에만 틀어박힌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타인이 왜 필요할까? 세상이 왜 필요하지? 글 속에 숨으면 되는데.

하지만 글 속에 숨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문장은 늘 타인과 세상을 향한다. 

나는 여전히 겁이 많다. 제주로 이주하는 것도, 밭지킴견을 돌보는 것도, 개 주인에게 접근하는 것도 실은 무서웠다. 하지만 겁이 날 때마다 내 바깥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 

펠릭스 잘텐의 동화 <밤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이다.

'밤비는 구멍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벚꽃 구경하는 밤비, 아름다운 마을. ⓒ 유재연

*

나는 용기를 내서 밤비의 주인에게 말했다. 산책을 한다면, 밤비의 성격이 밝아질 거라고. 주인 아저씨는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레몬차도 타주셔서 그 집 정원 테이블에 앉아 마셨다.

그 뒤로 밤비는 주인 아저씨와 매일 산책을 한다. 

나도 종종 밤비와 나간다. 밤비는 마을 한바퀴를 돌며 동네 개 흰돌이와 인사도 하고, 방끗 사진관에 가서 근처 목장의 강아지들과 놀기도 한다. 밤비는 다른 개를 만나면 늘 바닥을 기어서 다가간다. '겁내지 마요. 난 무서운 강아지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느 날은 밤비와 바다로 갔다. 밤비는 파도 소리를 듣고 처음엔 당황했지만, 조심조심 해변으로 걸어갔다. 해초 냄새를 킁킁 맡고, 다가왔다 도망가는 파도를 쫓기도 했다. 수평선이 넓게 펼쳐진 해변에는 몸을 숨길만한 좁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밤비는 더 이상 숨을 곳이 필요하지 않았다. 밤비는 반짝이는 모래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춤을 췄다.
바다에서 뛰노는 밤비. ⓒ유재연
밤비와 목장을 산책하며. ⓒ최은창 방끗사진관 대표

유재연

제주시 조천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밭지킴견을 산책시키고, 소설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