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한 마디에 대학 중퇴한 연출부 막내...31년 후 '왕사남' 신화 썼다

당신이 잘 몰랐던 장항준 감독<4·끝>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당초 개봉일이 2월 4일이 아니었다.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올해 5월쯤을 목표로 개봉 준비를 한다고 영화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개봉 시기를 급하게 앞당겼다. 대목인 설날 연휴를 겨냥하는 게 흥행몰이에 더 유리한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는 오래 전부터 설날 연휴 개봉한다는 게 업계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조인성과 박정민, 박해준, 신세경 등 화려한 출연진에 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235억 원짜리 대작에 ‘왕과 사는 남자’가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 됐다.
영화업계에서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을 앞당긴 점을 주목했다. 게다가 ‘휴민트’보다 1주일 먼저 극장가에 선보인다는 점에 관심이 쏠렸다. 자신감의 발로 아니냐는 게 업계 해석이었다.
“뭔가 있다”는 업계의 예감은 적중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 1,663만 명(23일 기준)을 모으며 ‘명량’(2014·1,761만 명)에 이어 역대 관객 수 2위에 올라있다.

‘왕과 사는 남자’의 개봉을 앞당기자고 적극 나선 이는 장원석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대표라고 알려져있다. ‘왕과 사는 남자’가 블라인드 시사회(영화 정보를 전혀 알려주지 않고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주는 극비 시사회)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게 장 대표의 ‘촉’을 건드렸다. 그는 ‘왕과 사는 남자’가 설날 연휴를 겨냥해야 크게 흥행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컴퓨터그래픽(CG) 등 후반작업이 미진한 데도 ‘왕과 사는 남자’가 조기 개봉을 강행한 배경이다. 비에이엔터테인먼트는 ‘왕과 사는 남자’의 공동 제작사다.
장 대표는 블라인드 시사회 평점을 많이 신뢰한다. 그는 역시 블라인드 시사회 평점이 높았던 '범죄도시2' 개봉(2022년 5월 18일)을 감행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려 사람들이 극장 가기를 꺼리던 시절이었다. ‘범죄도시2’는 1,269만 명이 보며 전편 ‘범죄도시’(2017, 688만 명)의 2배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당초 비에이엔터테인먼트는 ‘왕과 사는 남자’와 별 관련이 없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신생 영화사 온다웍스의 창립작이다. 임은정 온다웍스 대표는 CJ ENM 영화투자팀 근무 당시 읽었던 ‘왕과 사는 남자’의 시나리오 판권을 회사에서 나온 후 확보해 본인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그는 장항준 감독을 연출자로 점찍었다. 장 감독은 신진 제작자인 임 대표를 장원석 대표와 연결해줬다. 제작 경험이 많은 장 대표가 함께 하면 제작이 원활하게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장 감독이 장 대표를 소개하지 않았다면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이 쉽지는 않았을 수 있다. 물론 지난 일에 ‘만약’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말이다.
장 감독과 장 대표는 인연이 깊다. 30년이 넘은 관계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고, 어떤 일들을 함께 해 왔을까.
영화에 인생을 건 20대 청년들

장 감독과 장 대표는 영화사 영화세상을 매개로 인연을 맺었다. 장 감독은 서울예대 졸업 후 방송가에서 작가로 일했다. 그는 1994년 말 SBS 예능프로그램 ‘좋은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방송작가 일을 그만뒀다. 서울예대 동기 장진 감독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된 게 자극이 됐다.
장 감독은 시나리오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현실은 막막했다. 당시 서울예대에서 강의하던 강한섭(1958~2021)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그를 도왔다. 강 전 위원장은 대학 친구인 안동규 영화세상 대표를 찾아갔다. “최근 서울예대 졸업생 중 글을 가장 잘 쓰는 친구”라며 장 감독을 소개했다. 장 감독은 곧바로 영화세상에 출근하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안 대표는 장 감독을 여관방에 장기 투숙시키며 시나리오 작성을 독려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안 대표는 장 감독 ‘작업실’ 유리창 한쪽에 ‘장진 타도’라는 구호가 적힌 종이를 붙여줬다. 시나리오 쓰기에 지쳤을 때 커튼을 살짝 젖힌 후 의욕을 다시 불태우라는 의도에서였다. 장 감독이 시나리오 집필에 전념하며 데뷔 준비에 매진할 때 장진 감독은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로 시나리오작가까지 먼저 됐다. 안 대표가 ‘타도’라는 과격한 단어로 장 감독을 자극할 만도 했다.

장 감독은 ‘박봉곤 가출사건’(1996) 시나리오를 1995년 탈고했고, 영화는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장 감독의 시나리오작가 데뷔작이 된 ‘박봉곤 가출사건’ 연출부 막내는 장원석 대표였다.
장 대표는 1995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영화학도였다. 안 대표는 그해 1학기 중앙대 연극영화과 특강에 나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영화 현장에 관심이 있으면 여름방학 때 ‘박봉곤 가출사건’ 촬영장에 누구든지 와보라고 제안했다. 장 대표가 유일한 지원자였다. 그는 대학생 신분으로는 드물게 연출부원이 됐다.
이제 막 데뷔 시나리오를 쓴 20대 중반 장 감독과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를 몸으로 배우던 20대 초반 장 대표는 엇비슷한 처지였다. 둘은 영화계 상층부는커녕 바닥에 해당하는 위치에 서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1,660만 관객으로 결실 맺은 31년 인연

장 대표는 ‘박봉곤 가출사건’이 개봉한 1996년 군 입대를 했다. 2년 6개월 뒤 그가 제대했을 때 장 감독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연출 데뷔작이 될 영화의 연출부에 들어오라는 거였다. 하지만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한 장 대표는 연출부에 합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로 이제 막 복학했으니 휴학을 할 수 없었다.
장 감독은 “영화를 하기 위해 대학을 갔는데, 지금 영화가 기다리는데 왜 피하니”라고 장 대표에게 반문했다. 영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학교에 연연하지 말고 뛰어들라는 의미였다. 장 대표는 고민 후 중퇴를 결심했다. 하지만 장 대표가 학교까지 그만두며 합류한 장 감독 영화는 촬영을 앞두고 제작이 무산됐다.
당시 영화계에는 좋지 않은 관행이 있었다. 스태프가 아무리 일을 했다 해도 촬영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화사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 장 감독의 무산된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장 감독은 장 대표를 비롯해 함께 촬영을 준비했던 스태프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관수 프로듀서를 찾아갔다. 이 프로듀서는 ‘주유소 습격사건’(1999)으로 흥행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장 감독은 1,000만 원 가량의 돈을 부탁했다. 이 프로듀서는 영화 1편 연출 계약금 명목으로 장 대표에게 바로 송금했다. 장 감독은 스태프와 돈을 나눴다.

대학을 떠난 장 대표는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연출 대신 제작쪽에서 살길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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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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