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친어머니 아닌 사람 손들어”… 나는 끝내 손을 들지 않았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소년 시절 내내 나를 짓눌렀다


아버지의 재혼
커다란 좌절 속에 고향을 떠나 홀홀단신 안의로 망명한 아버지는 잠시 안의중학교 교감 직을 맡았다가 몇 달 만에 교장이 되었다. 그러고는 이내 주위의 재혼 권유를 받아들였다. 내가 월산학교 4학년 가을의 일이다. 철늦은 코스모스가 더욱 소슬한 자태로 흐느적대던 날, 아버지는 굳이 학교로 찾아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위해서 새엄마를 들여야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고 땅바닥만 내려보았다. 이미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1년 전 "네 어미는 죽었다"라며 치마폭에 나를 바짝 끌어안던 할머니도 어느새 공범이 되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를 안의로 되돌려 보내면서 나는 가슴이 패이는 망망한 아픔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새엄마와 함께 지낼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한 달 후, 1957년 늦가을, 재취댁을 맞아들이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안의에서 신식 결혼식을 치르고 온 신혼부부는 다시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 차림으로 구식 혼례를 치렀다. 10년 전 내 어머니가 치른 초례(醮禮)의 기억이 선명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새어머니가 전처 소생의 두 자녀에게 떡국을 떠먹이는 가례 의식도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인상의 스물두 살 여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음전하게 받아먹었다. 동생은 마냥 즐거워했다.
이듬해 봄, 동생은 아버지의 새 가정에 합류했다. 두 아이를 한꺼번에 키우게 하는 것은 어린 새색시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라며 할머니는 나를 붙잡아 두었다. 나는 아버지도 친엄마도 새엄마도 없는 아이가 되었다. 이듬해인 5학년 여름방학에 할머니와 함께 안의에 들렀다. 동생은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 나는 부러운 마음을 누르며 되돌아왔다. 돌아와서 쓴 기행문에도 가족 이야기는 빼고 풍광만 그렸다.
5학년 가을, 읍내 공설운동장의 군민체육대회를 참관하는 길에 밀양국민학교에 들렀다. 내가 다니던 시절의 가교사가 아니라 육군병원이 이전하고 되찾은 본교사였다. 나는 행여 옛날 모란반 친구들을 마주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성내 소년이 벽촌 아이로 전락한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게다가 내가 전학 간 사유는 어떻게 알려졌을까 하는 불안에 오금이 저려왔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시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굳세게 열심히 살아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하셨다. 선생님은 나를 동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애써 복잡한 마음을 감추는 듯했다. 나는 왈칵 설움이 북받쳐 아무 말도 못 하고 땅만 내려다보았다. 그 인자한 유영원 선생님을 다시 뵐 기회가 없어 못내 아쉽다.
청운의 할머니 방에서 산 나는 공상이 많은 아이였다. 때때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삼십 분 단위로 종을 치던 안채의 괘종시계가 '땡' 소리 한 번을 세 차례 연거푸 내는걸 들은 기억도 있다. 내 공상의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어머니였다. '죽은' 친어머니와 새로 맞은 새어머니의 존재가 머릿속에 거대한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접하는 옛이야기는 하나같이 계모를 나쁜 인간으로 그렸다. 《장화 홍련전》 《콩쥐팥쥐》 그리고 《심청전》의 뺑덕어멈, 이 모든 고전이 천편일률적으로 계모=악처 상을 강요하고 있었다. 김종래의 그림 이야기 《엄마 찾아 삼만리》도 제목부터 불편했다. 그러던 중 어딘가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가 훌륭한 계모였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더할 수 없는 위안이었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새어머니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도력 없는 반장
학적부의 5학년 칸에는 "학과 성적 우수하며 매사에 적극적이며 단체생활에는 희생적 정신이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별로 호감을 사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6학년 부분에는 지도력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내 스스로 돌아보면 5학년 선생의 평가가 더욱 정확한 것 같다.
3학년 2학기에 전학 온 나는 4학년부터 졸업할 때는 줄곧 반장을 맡았다. 4학년 때는 반장 부반장을 투표로 뽑았다. 후보자는 동급생의 추천으로 결정되었다. 투표에서 나에게 진 전임 반장은 대대로 우리 집에 종속되어 있던 집안의 아들이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았기에 몸도 크고 통솔력도 남달랐다. 나는 한동안 그를 대하기가 매우 거북했다. 5·6학년 때는 선거 없이 임명받았던 것 같다. 민주적 대표 대신 담임선생의 개인적 선택이었다. 어쨌든 나는 인기도 통솔력도 없는 반장이었다. 차렷! 경례! 오로지 책상머리에서만 급우들을 리드했다. 급우 중에 인기 있는 사실상의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 그는 공부도 운동도 출중했다. 나이도 나보다 두 살 위였다.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반장은 당연히 그의 몫이어야 했다. 나는 오로지 학교에 영향력 있는 집안의 아이로 성적도 1등이란 이유로, 동료들의 신망보다는 시샘 속에 반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학과 성적만 따지면 실제의 일등은 그도 나도 아닌 부반장 여학생이 아니었나 싶다 (반장은 항상 남자의 몫이었기에 그는 만년 부반장이었다).
반장 부반장은 모두 그래도 살만한 집 아이들의 몫이었다.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숙제할 시간도 없이 들에서 소 먹이고 산에 나무하러 다녀야 하는 급우들에게 학교 성적은 사치였다. 나는 그런 일과는 무관한 사람이라는 안도감과 선민의식에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세상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나는 마지막 두 해 졸업식에 연이어 주역을 맡았다. 5학년 때 재학생 대표 송사와 6학년 때 졸업생 답사를 직접 쓰고 읽었다. 글쓰기에 관해서는 동급생 누구도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여학생들을 많이 울려야만 성공한 송별사가 된다. 1946년 문교부가 제정한 졸업식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풍금 반주 소리가 처연한 감상을 더해 주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60명 남짓한 졸업생 중 스물 남짓이 중학교에 진학했고, 나를 포함한 셋은 대학까지 마쳤다. 여학생 중에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둘이다. 졸업식은 울음바다가 된다. 대다수 여학생은 졸업과 동시에 학교생활이 영원히 마감되었다. '더 배울 수 없는' 처지 때문에 서러움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곳, 여러 층의 학교에 적을 두었기에 나는 동창회가 많다. 그 많은 동창회 중에 나는 재경 월산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장 성의를 쏟는 편이다. 사당동 지하철역 인근 실비집이 30년 단골이다. 한때 무한정 들이마시던 소주도 시들해졌고 노래방은 절연한 지 오래다. 늙음을 넘어 죽어가면서도 얼굴을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주름 하나하나에 골진 대한민국의 풀뿌리 역사를 본다. 나에 대한 동창들의 관심은 새 대통령도, 내가 쓴 새 책도 아니다. 오로지 어린 시절 함께 배운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 뿐이다. 만날 때마다 입 모아 다그친다. 언제 아들이 결혼하느냐고. 오래전에 회비에서 비축해 둔 마지막 축의금을 회계 처리해야 한다며, 나는 웃으며 맞받는다. 우리 이제는 자식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말자고.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