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어른’ 셰프 후덕죽 “손님 300명 응원, 날 붙잡았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26. 4. 25.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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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58년차 현역 요리사
한국 중식의 역사 후덕죽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참어른의 모습으로 시청자를 감동시킨 후덕죽 셰프는 "주방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고 했다./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여전히 전성기를 누리는 경력 58년 차 요리사. 한국 중식의 역사 그 자체라 불리는 후덕죽(77) 셰프다. 그는 서울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을 42년간 이끌며 요리사 최초로 대기업 임원이 됐다. 중국 고급 보양식 불도장(佛跳墙)을 유행시켰고,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으로부터 “본토보다 더 맛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2022년부터는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 풀만 호텔 중식당 ‘호빈’을 총괄하며 2024~2025년 2년 연속 미쉐린 스타를 받았다.

그는 올해 초 종영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에 출연해 대중적 인지도까지 얻었다. 손자뻘 젊은 요리사들과 맞붙어 최종 3위에 오른 결과도 결과지만, 최고 경력·연령 요리사임에도 마늘을 다지고 참외를 절이는 등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몫을 다하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에 수많은 시청자가 감동했다.

14일 오후 2시 30분 점심 영업이 끝난 호빈에서 후 셰프를 만났다. 인터뷰는 점심과 저녁 영업 사이 브레이크 타임에만 가능했다. 그는 58년째 매일같이 주방을 지킨다. 그는 “한때 은퇴를 고민했던 나를 붙잡아준 건 손님들이었다”며 “그런 손님들에게 나갈 음식을 확인하지 않고 내보낼 수 없어서 오늘도 주방을 지킨다”고 했다.

‘흑백2’에서 ‘참어른’으로 인기

-흑백2로 얻은 인기가 여전하다면서요.

“부모 따라온 초등학교 1학년생이 ‘후 셰프님이시죠’라고 물으면서 사진을 찍자고 해요. 또 얼마 전 일가족 여덟 분이 오셨어요. 할아버지께서 ‘손자들이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후 셰프님 보겠다고 처음 한국 들어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여파가 이렇게 오래 갈지 몰랐어요(웃음).”

-반세기 넘게 외부 활동을 하지 않던 분의 방송 출연이 의외였습니다.

“‘팔선’에서는 항상 긴장하고 대기해야 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죠. ‘흑백2’는 한 달을 거절하다 저를 모르는 젊은 분들에게 제 음식을 소개할 기회가 되겠다 싶어서 승낙했어요.”

-단체전에서 최고령 셰프가 주방 막내가 할 법한 일을 했습니다.

“축구를 하면 누구나 골을 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격수가 될 수는 없지요. 누군가는 수비수가 돼서 골문을 지켜야 합니다. 주방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어요.”

-엄격하기로 소문났었는데, 방송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주방에서는 지금도 엄합니다. 영업시간 전 모든 재료와 양념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합니다. 방송에서 다르게 보인 건, 함께한 셰프들이 모두 쟁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준결승 미션 ‘무한 요리 지옥’ 편이 화제였습니다.

“5가지 당근 요리 모두 즉흥적으로 개발한 거예요. 재료 하나로 30분 만에 요리를 하나씩 완성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어요. 할수록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샘솟았어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만들었어요. 맨 마지막 ‘어향 당근’ 만들었을 때가 새벽 4시였어요. 더 하라고 했어도 할 수 있었어요.”

-결승까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셨다면서요.

“결승전 주제 ‘나를 위한 요리’에 대비해 음식을 준비했고, 재료도 가져갔어요.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인 불도장을 중국 황실 스타일로 새롭게 선보이려 했는데 아쉬워요.”

후덕죽 셰프가 개발한 당근 짜장면./호빈

평생 원칙 세워준 ‘소금 탕수육’

후 셰프는 1949년 서울 서소문에서 화교 가정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열한 살 무렵부터 호기심에 웍(중국식 프라이팬)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는 “주방장이 웍을 돌리면 불이 휙휙 올라오는 게 멋져 보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중식당 주방에서 볶음밥을 만들다 혼났다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달걀 볶음밥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애가 제대로 하겠어요? 지저분하게 해놓으니 주방장이 ‘누가 이랬냐’며 화냈어요. 그래도 기특했는지 ‘너 요리하고 싶으냐’ 묻더니 이것저것 가르쳐줬어요. 형제들 도시락 메뉴도 주문받아 만들어줄 정도로 실력이 늘었죠.”

-아버지를 6·25전쟁 때 여의고 어머니도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죠.

“육남매가 먹고살기 위해 흩어졌어요. 친구 집을 전전하며 학창 시절을 버텼어요.”

-성인이 되고 첫 직장이 중식당이 아니라 ‘UN센터호텔’ 양식당이었습니다.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이었어요. 친구가 ‘너 고기 먹고 싶지 않냐’ 그래요. 거기 가면 스테이크랑 햄을 마음대로 먹는다는 거야.”

-2년 일하고 반도호텔 중식당 ‘용궁’으로 옮겼습니다.

“레스토랑에서 1년은 칼을 쥐어보지 못하고 선배 요리사 다섯의 양말과 속옷 빨래 따위 허드렛일만 했어요. 2년 차가 돼서야 빵을 구웠고, 오므라이스와 카레라이스도 만들었어요. 하지만 성장의 한계를 느꼈어요. 익숙한 중식을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당대 최고라는 용궁을 찾아갔어요. 받아주지 않더군요. ‘월급 안 줘도 좋으니 일만 하게 해달라’고 매달렸어요. 세 번째 찾아갔을 때 허락하더라고요.”

-‘소금 탕수육’을 손님에게 냈다가 잘릴 뻔했다면서요.

“점심 영업 끝나기 직전, 홀 매니저가 탕수육 주문이 들어왔대요. 주방에 저만 있었어요. 쉬러 나간 선배들을 불렀다가 싫은 소리 들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서두르다 소스에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버렸어요. 지금까지 나한테 제일 큰 실수야. 난리가 났지.”

-어떻게 해결했나요.

“솔직하게 잘못을 빌었어요. 다행히 손님이 웃으며 진심을 받아줬어요. 제대로 된 탕수육을 다시 만들어 내드렸죠. 이 아찔했던 순간이 가장 큰 배움으로 남아 있어요. ‘만들기 전 모든 걸 점검하고 완벽할 때 시작하라’는 평생의 원칙을 만들어줬어요.”

후덕죽 셰프의 대표 요리인 '불도장'./호빈

인생 요리 불도장 탄생 비화

입사 4년 만인 1974년 반도호텔이 폐업하면서 용국도 문을 닫았다. 후 사부는 누나가 살던 일본 도쿄로 갔다. 일본어 배우는 틈틈이 롯폰기 중식당에서 용돈도 벌 겸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거기서 광둥식이라는 새로운 중식을 만났다.

-일본의 중식은 한국과 다르던가요.

“한국은 산둥식이죠. 간이 세고 기름지죠. 광둥식은 담백하죠.”

-손님 입맛에 맞추는 유연성을 배웠다고.

“일본 사람들이 매운 걸 잘 못 먹으니까 마파두부에 고춧가루 대신 케첩으로 색을 내더라고요. 기본은 지키되 먹는 사람의 입맛에 맞추는 게 진짜 기술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중식당 주인이 저를 잘 봐서 계속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UN센터호텔 다닐 때 만나 사귀던 아내와 결혼해 함께 가려고 했어요.”

-왜 가지 않았나요.

“점집에서 사주를 봤더니 ‘아내가 한국을 떠나면 명이 짧아진다’는 거예요. 또 다른 점집도 똑같이 얘기해요. 돈 많이 벌어도 아내 건강이 나빠진다니 포기할 수밖에요. 중식당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아쉬워했어요.”

-그러다 신라호텔에 입사했군요.

“경기도 오산 골프장 주방에서 2년여 일하다 신라호텔 ‘팔선’ 오픈 멤버로 입사했어요. 당시 면접관은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파견 나온 일본인 부사장이었어요. 일본어 할 줄 알고 일본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니 좋게 본 거죠.”

-불도장은 어떻게 개발했나요.

“1987년 사회가 어수선해서 호텔 매출이 바닥을 칠 때였어요. 중식을 배우러 중국 전역과 도쿄, 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로 엄청 다녔어요. 하루 네다섯 끼를 먹으며 느낌을 적고 궁금한 건 직원에게 물었어요. 밤에는 먹은 요리 재료와 그릇, 서빙법까지 기록했어요. 그때 불도장을 알게 됐죠. 매출 타개를 위한 신메뉴로 괜찮겠다고 판단했어요.”

-한국인 입맛에 맞춰 변형시켰다고.

“본토 불도장은 국물이 걸쭉해요. 서너 명이 함께 먹도록 큰 그릇에 나오고요. 저는 맑은 국물로 바꿔 1인 그릇에 냈습니다. 손님들이 전날 술 드시고 해장할 국물을 찾을 거라고 봤거든요.”

-이름 때문에 불교계에서 난리 났다면서요.

“불도장은 ‘스님이 냄새에 이끌려 절 담을 뛰어넘은 음식’이라는 뜻이죠. 이렇게 홍보했더니 조계종에서 ‘불교를 모욕했다’며 호텔에 항의했어요. 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서 예약을 받지 못할 정도였어요.”

-어떻게 설득했나요.

“총지배인과 조계종을 찾아갔어요. ‘이름의 유래가 원래 그렇다. 불교를 모독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어요. 간신히 양해를 얻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으로 오히려 입소문이 났어요. 손님들이 ‘거 불도장인가 뭔가 있다던데’라며 찾더라고요.”

후덕죽 사부는 열한 살 무렵부터 웍을 잡았다. 그는 "주방장이 웍을 돌리면 불이 휙휙 올라오는 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고 했다./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은퇴 결심 돌려세운 종이 뭉치

그도 은퇴를 고민한 때가 있었다. 2019년 팔선을 떠나 서울 강남 르 메르디앙 호텔 중식당 ‘허우’를 맡았지만 2021년 코로나로 호텔이 폐업하면서 식당도 문을 닫았다. 그는 “이제 쉬라는 뜻인가 보다 생각했다”고 했다.

-은퇴하지 않은 계기가 마지막 영업 날 카운터 직원이 건넨 종이 뭉치였다고요.

“300명 넘는 손님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어요. ‘셰프님이 어디 가건 꼭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하더랍니다. 깜짝 놀랐고, 감사했어요. ‘쉬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3개월 만에 리버사이드 호텔 중식당을 맡았다고.

“특급 호텔에서 일하던 셰프가 왜 3성급 호텔로 가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었죠. 가능한 빨리 ‘다시 드시러 오시라’고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후 사부는 리버사이드 중식당을 궤도에 올려놓고 2022년 호빈으로 옮겼다. 그는 “앰배서더 호텔이 리뉴얼하면서 식음업장 고급화 전략을 편다는 데 뜻이 맞았다”고 했다.

-올해는 미쉐린 별을 받지 못했습니다.

“미쉐린 서울에 소개는 돼 있어요. 미쉐린이 별 숫자를 안배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손님 입맛은 무조건 왕인가요.

“조리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손님 입에 맞지 않으면 맛없는 거예요. 손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다 기록합니다. ‘지난번에 이렇게 해드렸는데 그대로 해드릴까요? 조금 다르게 해드릴까요?’ 여쭤보고 맞추는 거예요. 그래야 계속 찾아주시죠.”

-시대에 따라서 음식도 변화해야 할까요.

“음식이란 패션과 같다고 봐요. 계절에 따라 입는 옷이 바뀌잖아요. 음식도 그래요. 기본은 유지하되 담는 방법이라든가 소품이라든가 꾸준히 바꿔줘야죠.”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뭔가요.

“자기관리죠. 몸 컨디션이 좋아야 해요. 내 몸이 불편한데 어떻게 손님을 위해 서비스하겠어요? 미묘한 맛 감별을 위해서 술과 담배는 가급적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봅니다.”

-언제까지 현역 요리사로 활동하실 건가요.

“2년만 있으면 60년이죠. 그때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후로는 뭘 하고 싶으세요.

“중국 곳곳에 가서 중식을 배우고 싶어요.”

-여전히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시네요.

“백화점에서 아내가 쇼핑하는 동안 지하 식품관에 가봅니다. 요즘 어떤 식재료가 나오나, 어떤 새로운 음식이 있나 궁금해서요. 쉬는 날이면 아내와 연남동이나 홍대로 갑니다. 인기 맛집에서 30분씩 기다려 먹기도 합니다. 새로운 맛을 찾는 게 즐거워요.”

인터뷰를 마친 후 사부가 “저녁 영업을 준비해야 한다”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뒷모습이 신참 요리사처럼 활기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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