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 때 고립주의 택한 미국, 100년 만에 다시 대논쟁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중앙SUNDAY·EAI 공동기획 ② 윌슨 패러독스
![1919년 1월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이탈리아·프랑스·미국 정상들(왼쪽부터). 윌슨 미 대통령은 국제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5/joongangsunday/20260425003637371slkq.jpg)
윌슨, 공화당과 비타협적 태도 파멸 초래
그리하여 1917년 봄, 미국은 윌슨의 영도 아래 “새로운 외교”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만들기” 같은 이상주의적 구호를 내걸고 구세계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윌슨과 그의 자유주의적 동지들에 따르면 미국이 참전한 까닭은 단순히 영토를 탐하거나 국익을 증진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끝없는 전쟁을 양산할 뿐인 전제 군주국들의 탐욕과 세력균형의 룰에 따르는 낡은 국제질서를 전복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들이 자유롭게 통상하며 힘의 균형 대신 힘의 공동체를 이루는, 완전히 새로운 자유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고귀한 시도였다. 이런 맥락에서 1918년 1월 의회에서 발표된 이른바 ‘14개조’ 연설은 ▶공개 외교 ▶항해의 자유 ▶민족자결 ▶무역장벽 철폐 ▶군비 축소 등 윌슨주의 신외교 원칙을 구체적으로 천명한 계기였으며, 그 정점에 집단안보 개념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구상이 놓여 있었다.
대전이 끝난 후, 윌슨은 반년 넘게 파리에 몸소 머물며 이 같은 이상을 평화 회담장에서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그러나 윌슨의 선의와 달리 또 다른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다른 전통적 현실주의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국토가 크게 파괴되었고 국력의 약세를 절감한 프랑스는 독일에 철저히 복수하여 미래의 위협을 원천 봉쇄하려 하였기에 윌슨의 ‘승리 없는 평화’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때문에 윌슨은 자신의 국제연맹 구상을 지키기 위해 전후처리 내용에서는 두 유럽 승전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서명 장면. 윌리엄 오펜 작품으로 가운데 서류를 든 사람이 윌슨 미 대통령이다.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25/joongangsunday/20260425003638640ecvj.jpg)
더 큰 난관은 미국 국내정치 영역에 존재하였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연방의회에서 대논쟁이 벌어졌는데, 미국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를 놓고 국제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 사이의 근본적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1918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야당인 공화당이 조약 비준의 열쇠를 쥔 상원을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집단안전보장을 규정한 규약 10조가 핵심 전선을 형성하였다. 침략 공격이 발생했을 때 회원국들이 연맹 차원에서 반대하는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한 조항인데, 반대파들은 이를 비준하면 미국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제 분쟁에 연루되는 치명적 결과에 이를 것이라 주장하였다. 미국의 오랜 국가주의적 전통(America First)에 입각해 집단안보 개념을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초국적 기관에 주권이 양도되는 상황에 우려를 표한 것이다.
반면, 윌슨은 처음부터 이 문제에 있어 매우 비타협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가령 파리 강화회의장으로 출국하면서 오로지 여당인 민주당 출신 측근들로만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그런데도 1919 대논쟁의 과정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다. 당시 연방상원은 세 개의 파벌로 갈라져 있었는데, 한쪽엔 윌슨주의를 추종하는 민주당의 원안 지지파가 존재한 반면 다른 쪽엔 조약 비준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공화당 위주의 강경 비타협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둘 사이엔 미국의 주권을 보호하고 국제연맹 참여 의무를 다소 축소하는 방향으로 단서 조항들을 신설하자는 유보파가 상당수 존재했다. 만일 헨리 캐벗 로지 공화당 상원의원이 이끌던 유보파와 윌슨이 타협했다면 조약의 통과가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규약 10조에 대한 어떤 수정도 국제연맹의 핵심 취지를 무효화 한다고 여긴 윌슨은 협상을 거부한 채 국민 여론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1919년 9월 3주간에 걸쳐 8000마일(1만2874㎞) 이상을 돌며 전국 순회 연설에 나섰다.
결국 상원이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지도 국제연맹에 참여하지도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됨으로써 윌슨의 최대 정치적 업적은 파멸을 맞게 되었고, 윌슨 자신의 신체마저도 심각한 뇌졸중으로 불능상태에 이르게 된다.
192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워렌 하딩은 고립주의를 “정상 상태”로의 복귀라고 주창하며 압승했다(선거인단 531석 중 404석, 일반투표 60%). 명실상부, 고립주의를 택한 국민투표라고 불릴 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이 빠진 채 1920년 1월 국제연맹이 공식 발족함으로써 전간기 유럽은 미국이란 핵심 패권 안정자 없이 불안정한 기반 위에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부터 2차 대전을 잉태한 두 번째 씨앗이다.
자유질서 수호 vs 민족국가 퇴행 갈림길
이상의 1차 대전 이후 윌슨주의의 흥망성쇠 과정은 냉전 종식 이후 자유국제질서 프로젝트의 궤적과 포개져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냉전의 종식은 미국인들에게 또 한 번의 이상주의적 혁명의 계기로 받아들여졌다. 유례없는 단극의 환경을 맞아 이번에야말로 어떠한 지정학적 장애물 없이 윌슨주의의 꿈을 전 지구에 실현시킬 수 있는 역사적 기회로 여겨졌다. “역사의 종언” “신세계질서”와 같은 슬로건들은 당대의 장밋빛 세계 정신을 대변하였다. 자유승리주의에 기반한 거대 사회공학의 꿈이 특히 동유럽과 구소련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공산독재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방임 자본주의 사회로 개조하려는 그랜드 플랜이 나토 팽창과 ‘쇼크 독트린’의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자에 대한 ‘징벌적 평화’의 백래시는 반드시 시차를 두고서라도 회귀하기 마련이다. 전간기의 독일처럼 탈냉전기의 러시아 내에서도 일방적 ‘명령(diktat)’에 의한 평화에 의해 굴욕을 감수했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게 되었고, 결국 분노에 찬 피해자민족주의의 토양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서방이 이전 승전국들처럼 승리감에 도취되어 다음 전쟁의 구조적 배경을 구축하고야 말았다는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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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강화회의(베르사유 회의)=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에서 열린 국제 평화회의.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조 원칙을 바탕으로 협상했으나 승전국 중심의 논의로 독일에 전쟁 배상금, 영토 축소 등의 베르사유 조약을 강요했다.
●국제연맹=1920년 창설된 최초의 국제 평화기구. 윌슨 대통령이 제창했으나 정작 미국은 불참했고, 강제력 부재로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침략을 막지 못해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유명무실해졌다.
●실지회복주의(revanchism)=전쟁이나 조약으로 잃은 영토·권익을 되찾으려는 정치적 사상 및 운동. 히틀러가 이를 적극 활용,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쇼크 독트린=전쟁·재난·경제위기 등 사회적 충격을 틈타 신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강제로 밀어붙이는 정치 전략.
」
패권질서의 진정한 위험이 미국의 국내정치에서 유래한다는 점도 기시감을 준다. 전간기가 패권국이 부재한 공위적 상황(interregnum)에 빠지게 된 이유는 미국민들이 스스로 고립주의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1919년 대논쟁 상황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자유세계질서의 수호자가 될 것인지, 자신만의 주권을 우선하는 독립적 민족국가로 퇴행할 것인지를 놓고 미국내 사회세력 간의 경합이 한창이다. 2016년 대선 이후 트럼프의 “미국 우선”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를 둘러싸고 미국 사회가 10년의 세월 동안 내전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논쟁에 휩싸인 건 한 나라의 외교정책노선에 대한 다툼을 넘어, 과연 세계가 다시금 대공황과 세계대전 같은 체계적 카오스 상태로 빠져들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구질서를 창출하는 역사적 기회로 나아갈지를 가르는 중대한 분수령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건 한 세기 만에 세계사적 시간대를 또다시 경유하는 중이다.

차태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부교수. 존스홉킨스대 정치학 박사 출신이며 성균관대·공군사관학교 교수로도 있었다. 『30년의 위기 :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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