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감싸는 단맛, 봄날 같은 고소한 향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4. 2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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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두부
서울 마포구 ‘세모두부’의 들기름 두부구이.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교회 앞에 있던 동네 부식 가게에는 남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는 볼이 발그레하고 손이 크며 몸이 통통한 주인아주머니와 그 주변을 에워싸고 흥정하던 다른 여자들이 함께 북적거렸다.

심부름으로 두부 한 모를 사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펴지고 목소리가 당당해졌다. 하지만 반 모를 사는 날이면 주인에게 말 거는 것도 망설여졌다. “두부 반 모만 주세요.” 어렵게 입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주인장은 내 말을 듣더니 투명한 물속에 잠긴 두부를 한 모 들어 손바닥에 올렸다. 그리고는 시퍼런 칼로 두부를 반으로 잘라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러면 나는 도망치듯 가게를 나와 골목으로 뛰어갔다.

두부를 받은 어머니는 다시 작은 칼로 두부를 톡톡 잘라 찌개에 풍덩 담갔다. 그리고 나는 밥을 먹으며 김치찌개에 내 지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숟가락으로 두부를 마구 퍼 담았다.

봄은 산들바람처럼 슬그머니 찾아왔다. 어머니가 입은 외투는 훨씬 가벼워졌는데 처지고 굽은 어깨는 펴지지 않았다. 미리 예약을 하고 잡은 집은 두부를 전문으로 판다는 곳이었다. ‘세상의 모든 두부’를 줄여서 ‘세모두부’라고 이름 붙인 그곳은 마포역 뒤편 언덕을 조금 올라가야 나타났다.

우리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 앉은 어머니는 으레 “그냥 마음대로 시켜”라고 했다. “그래도 드시고 싶은 걸 골라보시라”는 나의 핀잔과 강요가 이어졌다. 마치 공부하기 싫은 어린애 마냥 억지로 메뉴판을 보던 어머니는 두부 한 모와 반 모 사이에서 고민하듯 몇 번이고 나에게 “괜찮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메뉴를 가지고 작은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만석이 되었다. 창밖으로 목에 사원증을 건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가게에 앉은 이들을 보더니 “어쩜 다 하나같이 여자들이니”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주인장과 나를 빼놓고는 손님·종업원 모두 여자였다.

짧은 점심 시간을 아껴 쓰라는 듯 식사는 빠르게 나왔다. 만든 지 3시간밖에 되지 않았다는 순두부에 올리브오일과 소금이 뿌려져 작은 그릇에 담겨 왔다. 순두부 한 숟가락에 두유를 먹는 것처럼 자글자글한 단맛이 혀를 간지럽혔다. 올리브오일의 날카로운 향이 은근한 콩의 풋내와 멀지 않게 느껴졌다. “맛이 특이하다”며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따로 모두부 몇 조각과 돼지 수육도 나왔다. 순두부보다 단단한 질감에 감각이 퍼지지 않고 한곳으로 집중됐다. 수육은 쫄깃했고 잡내 없이 깨끗했다. 자기 그릇에 담긴 명란젓, 고추장아찌 같은 반찬은 간간하여 맛에 악센트를 박아 넣었다.

어머니가 시킨 ‘명란 맑은 두부국’에는 바닷가 마을 할머니가 끓인 듯 명란이 듬뿍 들어 있었다. 다진 홍고추와 미나리가 느슨할 수 있는 국에 긴장감을 더했고 두부는 그 사이를 유빙(流氷)처럼 둥둥 떠다녔다. 수향미로 지었다는 솥밥은 밥알이 크고 투명했다. 밥을 따로 그릇에 퍼 담을 때마다 구수한 냄새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여자들은 소꿉놀이를 하듯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고 밥을 먹으며 웃고 입을 닦았다.

내가 시킨 마파두부는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진홍색 기름을 잔뜩 썼지만 맵지 않고 오히려 달달하며, 향이 길게 남는 종류였다. 밥에 물감을 붓듯이 마파두부를 가득 담아 비볐다. 겉으로는 사나워 보였지만 맛은 순하기까지 했다.

들기름 두부구이는 두부 한 모가 시루떡처럼 크게 잘려 나왔다. 색이 진하지 않게, 살짝 노릇하게 구운 두부를 잘라 억지로 어머니 밥 위에 올렸다. 어머니는 그만 먹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중에는 “두부가 든든해”라며 접시를 비웠다. 큼지막한 두부는 치밀한 질감이 이에 박히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흩어져 버렸다.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일을 정리하듯이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총총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두부 반 모를 가지고 저녁을 보내던 시간은 오래전에 끝이 났다. 콩나물시루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던 부식 가게의 커다란 빨간 대야, 그리고 하루 종일 물에 닿아 퉁퉁 부은 손으로 두부를 집어 건지던 아낙들 모두, 그때가 알고 보니 찰나의 봄날이었을까? 저 앞에 뛰듯 걷는 그녀들의 긴 머리카락이 경쾌하게 찰랑거릴 때, 뒤로는 고소한 향기가 잔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세모두부: 명란 맑은 두부국 1만5000원, 마파두부 1만6000원, 들기름 두부구이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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