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컬 더 활짝 꽃피우려면, 극장 인프라부터 늘려야

유주현 2026. 4.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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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꿈나무 ‘빌리들의 대부’ 박명성 프로듀서
1990년대부터 뮤지컬 시장을 개척한 박명성 프로듀서. 김정훈 기자
JTBC 새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첫 회. 무명 영화감독 황동만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1)를 보며 도약을 다짐하는 엔딩이 퍽 인상적이다. 오래된 영화 속 빌리가 지금도 꿈과 도약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건 무대를 통해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어서다. 지난 12일 국내서 4번째 시즌을 개막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첫 공연 객석엔 원작 영화와 뮤지컬을 모두 만든 연출 거장 스티븐 달드리도 있었다. 빌리 역 김승주 등 첫 무대라고 믿기지 않는 완벽한 무대를 보여준 아역들에 대해 그는 “영국판과 전혀 격차가 없다. 내가 만든 동선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보니 황홀하다”고 극찬했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할 순 없다. 승주를 포함한 4명의 빌리는 2년 가까운 ‘빌리스쿨’에서 발레와 탭댄스, 아크로바틱, 무술까지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얼마 전 SBS ‘영재발굴단 인피니티’ 방송에선 빌리스쿨 선배이자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무용수 전민철과의 화상통화도 성사됐다. 전민철은 2017년 시즌 개막 직전 급격한 성장 탓에 빌리가 되지 못했지만, 2024년 마린스키 합격 소식이 본지를 통해 전해지면서 ‘현실판 빌리’로 거듭난 발레리노다.

“그때 민철이는 정말 안타까웠죠. 발레고 뭐고 너무 잘했는데 막판에 변성기가 왔어요. 너무 아쉬워했는데,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됐다니 오히려 자기 인생에는 잘된 일이었던 것 같네요.(웃음)”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의 말이다. 그는 몇 달짜리 뮤지컬 한 편을 위해 빌리스쿨을 열어 어린 소년들의 꿈을 키워주는 진정한 ‘빌리들의 대부’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사진 신시컴퍼니]
‘렌트’ ‘맘마미아’ 등 히트작 국내 무대 올려
13일 만난 그는 전날 공연을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고 했다. 훈련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몇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버텨낸 아이들이니까요. 안일해지거나 중도 포기자가 나올 수 없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고도의 트레이닝 시스템이거든요. 오디션을 위해 매 수업 최선을 다해야 하니 발전할 수밖에 없죠. 어제 빌리 역 김승주와 마이클 역 이서준은 지난 시즌 ‘마틸다’에도 출연했던 아이들이라 연기도 안정적이더군요. ‘마틸다’도 아이들에게 7~8개월 투자해야 하죠.”

Q : 굳이 왜 이런 투자가 필요한 작품을 하시나요.
A : “라이선스 경쟁이 없잖아요.(웃음) 뉴욕·런던에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벌떼처럼 달려드는데 빌리와 마틸다는 전혀 없어요. 그만큼 돈과 시간, 공력과 인력이 들어서인데, 지금 보세요.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엄청나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잖아요. 미래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건 신시의 사명 같은 거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데, 극장 환경이 아쉽죠. 고생해서 만들어도 6개월~1년씩 장기공연을 못하는 환경이니까요. 인프라가 해결되야 K뮤지컬 시대가 열릴텐데 말이죠.”
그는 빌리 이전에 뮤지컬 프로듀서계의 대부다. 흔히 한국 뮤지컬 산업화의 시작을 2001년 ‘오페라의 유령’으로 꼽지만, 1998년 최초의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 ‘더 라이프’로 담금질을 시작해 ‘렌트’ ‘시카고’ ‘맘마미아!’ ‘아이다’ ‘마틸다’ 등 굵직한 히트작들로 뮤지컬 저변 확대에 앞장서 온 게 ‘프로듀서 박’이다. “신시는 1987년 연극을 하는 극단으로 출발했는데, 뮤지컬을 하던 롯데월드예술극장이 94년 없어지면서 거기 배우들이 우리한테 오는 바람에 뮤지컬을 주도적으로 하게 됐죠. 99년에 내가 대표가 되고 10년간은 연극은 미뤄놓고 오로지 뮤지컬만 했네요. 그 무렵 공연된 뮤지컬의 절반은 신시가 만들었습니다.”

뮤지컬 ‘맘마미아!’. [사진 신시컴퍼니]
그의 첫사랑은 연극이다. 해남 땅끝마을 ‘촌놈’이 차범석의 연극 ‘산불’에 반해 배우의 꿈을 품었고, 대학로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젊은 날을 보낸 이야기가 6월 출간될 자서전 『드림 프로듀서 컴플리트 컬렉션』에 빼곡하다. 배우로도 연출로도 실패하고 기획자의 길을 개척한 그에 대해 “너 같은 건 필요없다고 뿌리치는 첫사랑 연극에게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라며 떠나지 않는 참 징한 사랑”에 비유한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의 추천사가 재미있다. “서울예대를 가려고 상경했는데 연극과는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차범석 선생 원고 심부름을 하며 지낼 때 선생이 일단 무용과로 들어가 전과를 하라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주셔서, 결국 춤까지 추게 됐죠.”

Q : 그러다 첫사랑을 버리고 뮤지컬에 베팅하셨네요.
A : “내 뜨거운 열정에 뮤지컬이 잘 맞았나봐요. ‘더 라이프’를 보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콘텐트가 우리 국민성과 맞는 것 같고, 막연히 뮤지컬이 문화 트렌드를 주도하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관객층도 전혀 달랐죠. 연극은 경청하는 스타일이라면, 뮤지컬은 참여하고 박수치는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유입시켰어요. 실제로 ‘맘마미아’부터 중년 여성들이 다 같이 일어나서 춤추고 노는 문화가 생겼잖아요. 2000년 ‘렌트’ 초연 땐 이질적인 정서라고 다들 걱정했지만 초대박이 났죠. 우리 젊은이들은 이미 전 세계 문화를 다 포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Q : ‘렌트’도 배우사관학교 역할을 해왔죠.
A : “초창기엔 스타도 없었어요. 공정하게 오디션으로 뽑힌 실력있는 전문배우들이 스타가 되는 시스템이 자연스레 생겼죠. 외부 투자를 안 받으니 캐스팅에 간섭받지 않았고, 그래서 작품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어요. 나는 앙상블들에게 늘 말합니다. 우리 후배 배우들의 땀과 열정을 절대 배신 안 한다고요. 우리가 스타 캐스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고액 개런티가 없는 우리 오디션에 스타들이 안 올 뿐이죠.”
스타마케팅으로 인한 제작비 상승이 몰고 온 ‘티켓플레이션’은 뮤지컬 산업 발전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스타가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작품이 스타를 만든다’는 철학을 가진 박 프로듀서는 내년 8월 공연할 ‘아웃사이더즈’ 오디션이 향후 캐스팅 문화의 가늠자가 될 것 같다고 했다. 1980년대 톰 크루즈, 패트릭 스웨이지 같은 청춘스타들을 무더기로 배출한 추억의 영화 원작으로, 다음 달 오디션이 열린다.

Q : 제가 태어나 처음 본 영화로 기억합니다.
A : “옛날 소재지만 제목만 들어도 인지도 높은 원작으로 만드는 게 요즘 트렌드고, 30대 젊은 여성 연출가가 세련되게 만들었어요. 2024년 토니상을 휩쓴 파워풀한 작품이니 스타들도 관심 갖겠죠. 근래 보기 드문 고난도 안무에 개인적으로도 반했고요. 대박날 것 같다고요? 그럼 또 헛짓거리 하겠죠.(웃음)”
그의 ‘헛짓거리’는 알 사람은 다 안다. 원로 배우들의 기념 연극을 도맡아 제작하고, 원로들 위주로 캐스팅한 연극을 대극장에서 장기 공연하는 식이다. 틈날 때마다 연극인 후원에도 열을 올린다. 돈만 쓰고 속만 썩이는 ‘첫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애보인 셈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공연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는 그를 주변에선 ‘수퍼맨’이라고 부른다. ‘수퍼맨’이 K의 시대를 그냥 지나칠까. 영국에서 창작뮤지컬 ‘네로황제’를 개발 중이고, 블록버스터 연극 ‘해리포터’를 만든 존 티파니, 이번에 내한한 스티븐 달드리에게도 한국 콘텐트의 신작을 제안했다. 그는 이런 작업이 “창작뮤지컬이 크레딧을 얻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첫 시작 연극…대박 K뮤지컬 만드는 게 꿈

Q : 왜 네로황제인가요.
A : “누구나 아는 폭군이니 요즘 현실을 비춰볼 수 있고, 전 세계적인 보편성도 가질 수 있잖아요. 미국 작가에게 연극 ‘푸르른 날에’를 뮤지컬로 만들자고 제안했더니, 그건 한국 작가가 하는 게 낫겠다고 하더군요. 다시 여러 소재를 놓고 연구했죠.”

Q : 대본부터 글로벌로 개발했네요.
A : “물론이죠. 이제는 세계적인 예술가와 함께 만들 수밖에 없어요. 유명 라이선스 뮤지컬에 비해 창작뮤지컬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관객에게 크레딧이 없으니 볼까말까 고민하게 되잖아요. 우리도 몇백억 제작비를 투자하는 작품이 나와야 신뢰를 얻고 ‘K뮤지컬’이라는 용어도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랬을 때 종사자들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죠.”
갑작스런 변심은 아니다. 차범석의 ‘산불’을 무대화했던 ‘댄싱 섀도우’(2007)부터 조정래 소설 원작의 ‘아리랑’(2015), 걸그룹의 역사를 관통한 ‘시스터즈’(2023)까지, 창작뮤지컬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려왔다. 소위 ‘대박’이 안 터진 것인데, 그는 “세월만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탄식했다. “40년 넘게 업계에 있으면서 대표작 하나 못 만들어냈다는 게 가장 뼈아파요.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하죠. 이대로 무대인생 마무리할 건가, 만인이 대표작이라 할만한 걸 만들어놓을 건가. 그래서 부단히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접근해 봅니다. 국내를 넘어 파격적으로 도전할 필요가 있고, 세계적 명작을 만들어본 사람이라야 수백억짜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니까요. 그 정도 투자할 가치가 있고, 용기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험한 세상을 살아왔는데요.” 박명성의 ‘끝사랑’도 ‘첫사랑’만큼이나 징해 보인다.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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