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젓갈이면 한 그릇 뚝딱…일본 뒤집은 ‘조선 밥도둑’

2026. 4.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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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찰나의 맛’
속초 ‘김송순아마이젓갈’의 전통적 명란젓. [사진 박상현]
한국의 밥도둑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을 일본에서는 ‘고항노오토모(ご飯のお供)’라고 한다. 한국인에게 변함없는 최고의 밥도둑은 간장게장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에게는? 명란젓이다.

일본인이 명태알의 가치와 맛을 발견한 것은 조선을 식민지배하던 시기였다. 조선시대 동해안에서 잡힌 명태는 대부분 함경도 원산에서 가공됐다. 이때 가공이란 북어·황태 등으로 말리는 걸 의미한다. 겨울에 한꺼번에 많이 잡히는 명태를 일 년 내내 소비하기 위해서는 건조가 필수였다. 명태를 말리기 위해서는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는 할복작업이 먼저였고,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차가운 겨울에 맨손으로 생선을 손질하는 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당장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일이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고용구조가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인건비가 지급되지 않는 대신 할복작업의 부산물인 내장과 아가미 등은 작업자의 몫이었다. 즉 명태 한 마리를 잡았을 때 부산물은 할복작업자의 몫이 되고, 할복작업이 끝난 명태는 덕장 운영자의 몫이었다. 그럼 명란은 누구의 소유였을까? 선주의 몫이었다. 그만큼 비싸고 귀했다.

일본 명란 가공식품 시장 규모 1.5조원
이처럼 원산은 명태 조업과 가공을 통해 황태·북어·명란젓·창난젓·아가미젓 등이 생산되는 조선시대 명태 가공산업 클러스터였다. 이렇게 생산된 명태 가공품은 대부분 한양으로 유통됐다. 일제 강점기 때 원산항 명태 조업권을 일본이 독점하게 되자 명란도 일본 선주들의 몫이 됐다. 그리고 그 명란은 조선 옹기에 담겨 일본 시모노세키로 갔다. 그렇게 한반도에서 건너간 명란이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밥도둑이 된 것이다.

한반도 바다에서 명태가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났다. 당연히 명태도 명란도 수입한다. 이런 상황에서 명란에 ‘제철’의 개념이 있을까? 알을 밴 명태가 어획되는 시기로 본다면 명란의 제철은 지금이 맞다.

오늘날 명태는 북태평양을 경제수역으로 가진 러시아와 미국이 대부분 어획한다. 오호츠크해에서 잡히는 건 러시아산, 알래스카 주변 수역에서 잡히는 건 미국산이다. 명태 자체는 연중 조업이 가능하지만, 명란을 품은 명태는 산란기인 1~4월에만 잡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명란은 명태보다 비싸다. 그래서 이 시기에 잡힌 명태는 어선에서 바로 명란만 골라내 급속 냉동한다.

명란은 매우 독특한 생산과 소비구조를 가진 식재료다. 생산은 러시아와 미국만 하고, 소비는 한국과 일본만 한다. 명란의 국제 경매 역시 부산과 시애틀 단 두 도시에서만 이뤄진다. 명란의 최대 생산국은 러시아인데, 러시아산 명란은 전량 부산 감천항서 거래된다. 선상에서 냉동처리된 명란은 곧바로 부산 감천항에 도착한다. 매년 3~5월이면 부산 감천항 대형 냉동창고에서 러시아산 명란의 국제 경매가 이뤄진다. 지금이 가장 분주한 시기다. 국제 경매라고 하지만 참여국은 한국과 일본 단 두 나라(2025년부터 중국도 가세했다)뿐이다. 한국과 일본의 주요 명란 가공업체가 참여한다. 2개월 남짓한 경매 기간 동안 확보한 물량으로 일년 내내 명란 가공품을 생산한다. 따라서 명란의 국제 경매가 이뤄지는 지금이 명란 제조사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소비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올해 만나게 될 명란의 품질과 소매가격이 이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명란 가공식품 시장 규모는 1조5000억원 규모로 한국의 7배가 넘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명란 브랜드 ‘야마야’ 한 기업의 매출액이 한국 전체 시장 규모와 맞먹는다. 시장 규모보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건 명란의 가공 방식이다. 크게 2단계로 나뉘는데, 첫 단계로 소금이나 소금물에 재워 명란의 수분을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입자가 단단해지고 식감이 결정된다. 두 번째 단계는 양념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고춧가루·마늘 등의 양념을 듬뿍 곁들여 숙성시킨다. 이에 반해 일본은 고춧가루·다시마 육수·맛술 등의 조미액에 담가 숙성한다. 당연히 겉보기엔 일본식 양념법이 깔끔하고 상품성도 좋아 보인다. 덕분에 요즘 국내 명란 제조사들 대부분이 일본식 제조법을 선호한다.

명란 국제 경매 부산·시애틀서만 이뤄져
부산 ‘덕화명란’에서는 고춧가루·마늘 등의 양념을 듬뿍 곁들여 숙성시키는 한국 고유의 전통 제조법을 고수하고 있다. [사진 박상현]
명란 종주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도 억울한데 맛까지 양보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다행히 우리의 전통적인 양념법을 고수하거나 부활하려는 시도도 존재한다. 한국전쟁 이후 속초는 원산을 대신해 명태 클러스터 역할을 했던 곳이다. 속초에서 3대째 함경도식 젓갈을 만들고 있는 ‘김송순아마이젓갈’은 여전히 전통적인 명란젓 양념법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명란젓 생산 기업인 부산의 ‘덕화명란’은 전통적인 명란젓 제조법을 복원해 ‘조선명란’이라는 제품명으로 출시하고 있다.

일본식 명란젓이 달짝지근한 감칠맛이라면 조선식 명란젓은 칼칼한 감칠맛이다. 식재료는 사라졌어도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음식은 여전히 우리 음식이 분명하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의 미각도 복원이 필요하다.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카랑카랑한 전통 명란젓의 매력에 빠져보시길 권한다.

박상현 맛칼럼니스트. 음식의 탄생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는 것에 관심 많은 맛칼럼니스트다. 현재 사단법인 부산로컬푸드랩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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