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500조 시대 코앞인데···수수료는 2조원, 수익률은 1%대 ‘역설’
수수료 급증에도 체감 수익 정체
기금형 도입이 구조 전환 시험대

국내 퇴직연금 시장이 적립금 500조원 시대를 앞두고 구조적 변곡점을 맞았다. 20년간 유지돼 온 보험업계 중심 질서가 흔들리며 은행권이 시장 주도권을 넓히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다만 외형 성장과 달리 가입자의 실질 수익률은 정체되며 성장과 성과의 괴리가 심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24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 1분기 공시에 따르면 신한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54조7391억원으로 집계됐다. 삼성생명 53조4763억원을 제치고 전체 1위에 오른 것으로, 2005년 제도 도입 이후 처음 나타난 변화다. 보험업계 종가로 불리던 삼성생명이 선두 자리를 내준 것은 시장 구조 변화의 상징적 장면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흐름은 확정급여형(DB) 중심 구조에서 확정기여형(DC)·개인형퇴직연금(IRP) 중심으로 무게추가 이동한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기업이 운용을 책임지는 DB형과 달리 DC·IRP는 개인이 직접 상품을 선택하는 구조다. 상장지수펀드(ETF)와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투자상품 접근성이 중요해지면서 은행권이 플랫폼과 마케팅을 앞세워 자금을 흡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신한은행은 IRP 적립금을 20조원대까지 확대하며 성장세를 견인했다.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도 각각 48조원대 적립금을 확보하며 삼성생명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상위권 경쟁은 단순 순위 다툼을 넘어 업권 간 주도권 경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수수료 2조원 돌파···가입자 수익률은 제자리
시장 확대와 함께 사업자 수익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퇴직연금 상위 10개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은 총 2조1000억원을 넘어섰다. 적립금 증가에 연동되는 구조 특성상 금융사 수익은 안정적으로 확대되는 흐름이다.
반면 가입자의 체감 수익률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금융사들이 제시하는 두 자릿수 수익률은 실적배당형 상품에 한정된 수치다. 전체 적립금의 약 10% 수준에 불과한 영역으로 시장 전체를 대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80% 이상 자금이 몰려 있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평균 수익률은 여전히 1~2%대에 머물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3%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은 마이너스 수준이다. 외형 성장과 가입자 성과 간 괴리가 구조적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계약형 구조는 손실 발생 시에도 사업자가 수수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구조라 가입자는 투자 리스크를 부담하지만 사업자는 적립금 잔액을 기준으로 수익을 확보한다는 맹점이 있다. 이로 인해 리스크는 가입자에게, 수익은 사업자에게 쏠리는 비대칭 구조가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금형 도입 추진···시장 구조 전환 변수
정부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기금형은 개별 기업이 금융사와 계약을 맺는 기존 방식과 달리 별도 기금을 통해 자산을 통합 운용하는 구조다. 노사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수탁법인이 운용을 맡는 것이 핵심이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대규모 자금을 기반으로 금융사와의 협상력이 강화된다. 수수료 인하, 운용 성과 평가, 운용사 교체 등 다양한 견제 장치가 작동할 수 있다. 기존 공급자 중심 구조에서 수요자 중심 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셈이다.
공공 부문에서 운영 중인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 '푸른씨앗'은 이미 수치상 성과를 입증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푸른씨앗은 2025년 말 기준 연 수익률 5.2%를 기록하며 동기 시중은행의 원리금 보장형 평균 수익률(2.8%~3.1%)을 크게 상회했다.
수수료 측면에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일반 금융사가 평균 0.4%~0.5%의 수수료를 징수하는 것과 달리 푸른씨앗은 설립 초기 수수료 5년간 면제 정책과 더불어 이후에도 최저 수준인 0.1%대의 수수료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저비용·고수익' 구조는 금융사의 상품 중심 영업과 소극적 자산 배분을 교정할 수 있는 기금형 제도의 실효성을 방증한다는 평가다.
다만 금융업계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기금 설립 비용과 운용 책임 문제를 이유로 도입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대형 사업자들은 수수료 기반 수익 구조 약화를 우려하며 제도 설계 과정에서 영향력 확보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수익률 중심 체질 전환 필요
전문가들은 단순한 적립금 경쟁을 넘어 운용 효율성 중심의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입자 수익률 제고를 중심으로 시장 인센티브가 재설계돼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 퇴직연금 시장의 구조적 특징에 대해 "적립금 규모가 커질수록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이 안정적으로 증가하는 공급자 중심의 체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서 교수는 "시장 외형은 성장하고 있지만, 원리금 보장 상품 위주의 운용으로 인해 가입자의 노후 자산 증식 속도가 물가 상승률 등 거시 경제 지표를 하회하는 현상이 관찰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 교수는 기금형 제도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기금형 도입은 기존 계약형 체계에서 부족했던 자산 배분의 전문성을 보완하고 사업자 간의 건전한 운용 경쟁을 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라고 설명했다.
☞기금형 퇴직연금=기업별로 금융사와 계약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별도 기금을 만들어 퇴직연금을 통합 운용하는 제도다. 노사와 전문가가 참여해 운용사를 선정하고 성과를 점검하는 구조다.
여성경제신문 허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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