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반가운 사람 [독자산행기]

비가 오려는지 날씨가 많이 흐렸다. 빗속 산행이 될 듯했다. 김천역에서 버스를 타고 직지사에 도착했다. 황악산을 오르기 위해서다. 직지사에서 운수암까지는 길도 넓고 완만해 오르기 쉬웠다.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다. 한참 걸어 운수암에 다다랐다.
정상 가는 길이 어디 있는 거야? 산길이 없어질 리는 없을 텐데, 길을 잘못 들었나? 길을 찾기 위해 한참 운수암 주위를 맴돌았다. 암자 댓돌 위에 신발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스님이 없는 빈 암자인가? 법당문을 열어봐도 부처님만 계셨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다시 오던 길로 조금 내려오니 오른쪽에 조그만 이정표가 있었고, 거기에 정상 가는 길이 적혀 있었다. 못 보고 지나친 것이었다. 쉽게 볼 수 있도록 크게 적어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들머리부터 산길은 급하고 매우 좁고 돌도 많아 울퉁불퉁했다. 너덜길을 한참 올라 여시골과 정상 방향이 표시된 이정표에서 잠깐 쉬었다. 여시골이라니, 여우를 사투리로 부르는 말이 아닌가? 여우가 많이 살아서 여시골이라 하나? 여시골을 뒤로 하고 백운봉으로 향했다.
날씨가 흐리고 안개까지 끼어 멀리 보이지 않았고, 혼자라서 두려운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날씨에 누가 산에 오겠나. 그런데 나는 왜 산에 왔나. 산이 좋아서 온 걸까. 아니면 산에 가는 습관에 젖어 온 것인지 모르겠다. 주위가 안개로 가려져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올랐다.

좁은 산길을 한참 오르니 쉬고 있는 40대쯤으로 보이는 부부를 만났다. 사람을 처음 만났으니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무척 반가웠다. 얼마나 산을 좋아하면 이런 날씨에도 산에 오를까,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어디서 왔는지 여자가 물었다. "대구에서 왔습니다." 자기들은 김천에서 왔고, 대구 대봉동에 동생이 살고 있어 가끔 들른다고 했다. "이것 좀 드세요"라고 여자가 말했다. 괜히 부부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고맙습니다만 그냥 가겠다" 하고 지나쳤다. 한참 오른 후 쉬고 있으니, 부부가 "먼저 갑니다" 하고 나를 지나쳐 갔다. 그래도 같이 오를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부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세 번 하고 나니 정상이었다. 정상석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뒷면에는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해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의 중앙을 가리키는 '황'자를 따서 황악산이라 부른다"고 적혀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하는 일들이 거침없이 이루어진다'는 뜻도 함께 적혀 있었다.
좋은 산이로구나. 좋은 장소에 왔으니 무슨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좋은 땅에도 바람도 불고 비도 오는구나. 좋은 땅이라고 해서 바람 불지 않고 비가 오지 않을 리는 없지. 당연한 것을 갖고 별생각 다 해보았다.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좋은 땅도 중요하지만,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좋은 땅에서 소원 하나를 빌었다.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발아래 세상이 하얗게 가려져 있었다. 비 오는 산은 맑은 날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산과 마주한 순간은 비로 인해 축축하고 불편할지라도 오히려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성급하지 않게 빗속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천천히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
날아드는 벌레와 점심을 먹었다. 비가 오는데도 벌레가 많이 날아다녔다. 목으로 몇 마리 넘어간 느낌이었다. 구름 때문에 산 전체를 보는 것은 포기해야 해서 안타까웠다.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옆을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앞만 보고 걸을 수밖에. 산에 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아마도 한없이 내어주는 산의 고마움을 배우고, 산의 정기를 받고 올랐다는 성취감과 호연지기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
부부는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으면 덜 외로웠을 텐데. 큰 산에 혼자 남았고, 비는 오락가락했다. 비옷 속으로 빗물이 들어와 젖은 옷은 체온에 마르고 비에 젖기를 반복했다. 바람재와 신선봉 갈림길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비가 온다고 불평하면 나만 손해다. 산행 중 맞닥뜨리는 비는 짜증과 원망의 대상이 아닌 새로움을 찾는 기쁨으로 만들어야지. 빗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났다. 조급하지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오니 비도 그치고 구름과 안개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만치 직지사가 보였다.
남자 한 사람이 배낭을 메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정상을 오르는 것일까? 설마 정상까지 가는 것은 아니겠지. 어디 가는지 물어나 볼 걸, 묻지 않은 걸 후회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정상 갈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운수암으로 가는 길이겠거니 생각했다.
사리탑을 지나고 직지사도 지나 버스 종점에 도착하니 마침 버스가 와 있었다. 시골길이라 버스도 드문드문 다니고, 종점에서는 한참 정차한 후 출발하는 경우가 많아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언제 출발하는지 기사에게 물어보니 지금 출발한다고 했다. 산행도 무사히 마치고 버스도 바로 출발하는 두 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 좋은 땅에서 빈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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