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주사위 던져 가격인상 통보, 고육지책과 자충수 사이

장우정 기자 2026. 4. 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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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약 3년 10개월간 인쇄용지 가격 담합을 벌인 제지업체 6곳에 총 338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뉴스1

종이 한 장의 가격을 동전과 주사위로 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먼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1년여 전인 2024년까지, 국내 인쇄용지 시장의 95%를 쥔 한솔·무림·한국·홍원 등 6개 제지사 임원들의 풍경이 그러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3일 공개한 담합 수법은 차라리 한 편의 풍자극에 가깝다. 거래처에 가격 인상을 누가 먼저 통보할지를 두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동전을 던지거나 주사위를 굴려 순서를 정했다. 경쟁사 임원의 연락처는 휴대폰에 저장하는 대신 회사명은 S·W·K 같은 이니셜로, 이름은 가명으로 바꿔 종이쪽지에 적어 보관했다. 통화도 본인 명의 휴대폰 대신 식당 전화나 길거리 공중전화로 했다. 21세기 대한민국 굴지 제조업체 임원들이 1980년대 첩보영화 한 장면을 재연한 셈이다.

이 장면을 도덕적 해이로만 읽는다면 공정하지 않을지 모른다. 제지사들이 가격 인상 논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던 사정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디지털 전환과 인구 감소, 디지털 교과서 확대 등이 겹치면서 인쇄용지 수요는 수년째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원가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펄프는 80% 넘게 해외에 의존하는 데다, 종이를 생산해도 재고가 바로 소진되지 않아 한 번 올린 가격이 다시 흘러내리기를 반복해 왔다. 버티다 못한 홍원제지는 결국 2024년 말 생산을 중단했고, 한국제지도 적자가 누적돼 최근 전문경영인으로 대표이사를 교체했다. 업계 공통의 비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방식이다. “함께 올려야 비용 부담을 가격에 반영할 수 있다”는 유혹에 손을 댄 순간, 고육지책은 자충수가 됐다. 제지업체들이 받은 3383억원의 과징금은 서막에 불과하다. 기업가치에 민감한 주주들의 이의 제기가 뒤따를 가능성이 크고, 책이나 교과서, 학습지를 통해 피해를 입은 소비자·출판계의 민사소송 움직임도 배제할 수 없다. 해외 거래처에서 “국내와 수출가가 다르게 움직인 것 아니냐”는 의심이 번지면 파장은 국경을 넘는다. 살기 위한 가격 담합이, 업계 전체의 신뢰 자산을 갉아먹고 생존 기반을 좁힌 셈이다.

가장 많은 과징금을 받은 업계 1·2위 한솔제지와 무림은 공교롭게도 모두 세대교체의 분기점에 서 있다. 무림은 창업주의 장손인 1978년생 이도균 사장이 2020년 3사 대표를 동시에 맡으며 오너 3세 경영을 시작했다. 한솔제지는 지난해 1979년생 오너 맏사위인 한경록 대표가 새 사령탑을 맡았다. 40대 후반 두 경영자에게 이번 사건의 무게는 서로 다르다. 이 사장은 담합이 진행된 전 기간 회사를 이끈 당사자다. 한 대표는 담합이 끝난 직후 부임해 뒷수습을 떠안은 처지다. 입장은 달라도, 두 사람 모두 이전 시대와 단절했음을 시장에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점은 같다.

임원들이 공중전화를 찾아다니며 가명을 주고받던 풍경은, 구조적 위기 앞에서 한국 제지업계가 가장 손쉬운 답에 기댔음을 보여준다. 그 답의 대가는 가장 비쌌다. 새 세대 경영자들의 숙제는 분명하다. 산업의 어려움을 담합으로 돌파하려던 시대를 자신의 임기 안에 끝내는 것. 그래야 다음 위기에서는 다른 답을 꺼낼 수 있다. 이번 사건이 한국 제지 산업이 새 시대로 건너가는 길목의 마지막 홍역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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