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도구인가, 제작자인가...콘텐츠 산업의 '책임 기준' 세우기 [엔터그알]

이해정 기자 2026. 4. 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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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슬 감독이 AI 영화 '원 모어 펌킨'을 설명하는 모습(제공=한국콘텐츠진흥원)

AI는 더 이상 콘텐츠 제작의 보조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기획과 제작, 유통 전반에 깊숙이 들어온 지금, AI는 사실상 콘텐츠 산업의 '인프라'로 기능하고 있다. 문제는 속도다. 기술은 이미 산업을 바꿨지만, 이를 따라갈 책임과 규칙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콘텐츠 산업은 이제 'AI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생성형 AI는 기존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을 의미한다. 바로 이 생성형 AI 확산 이후 콘텐츠 제작 방식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글로벌 OTT와 미디어 기업들은 AI를 활용해 시놉시스를 생성하고, 시청 데이터를 분석해 기획 단계부터 제작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있다. 제작 단계에서도 변화는 뚜렷하다. 영상 편집, 시각효과(VFX), 더빙과 번역 등 과거 인력과 시간이 집중되던 공정이 자동화되며 비용 구조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분명한 경제적 이유가 있다. AI는 콘텐츠 제작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속도를 끌어올린다. 현장에서 체감되는 효율 개선은 극적이다. 국내 AI 영상 제작 분야에서 주목받는 창작자인 권한슬 감독은 AI 영화 작업의 가장 큰 장점으로 '시간'을 꼽는다. 통상 3~4일이 걸리던 폭파 장면을 1분 만에 구현할 수 있게 됐고, 1년 반가량 소요되던 후반 작업 역시 한 달 반 만에 끝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제작 공정 전반이 압축되면서 동일한 자원으로 더 많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번역과 더빙 영역에서도 변화는 빠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만 하더라도 AI 결과물을 사람이 검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지만, 이제는 AI가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초기에는 AI 결과물을 보완하는 데 인력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1차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며 사람의 개입이 줄어드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다국어 콘텐츠 제작에서 이러한 변화는 제작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으로 직결되고 있다.

숏폼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변화는 더 극단적이다. 짧은 영상 콘텐츠는 기획부터 제작, 편집, 배포까지 AI 기반으로 자동화되는 흐름이 자리 잡았다. 이용자 반응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콘텐츠를 수정하거나 재생산하는 구조도 일반화되고 있다. 이는 효율 개선을 넘어 콘텐츠 생산 자체를 대량·반복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다.

CJ ENM AI 애니메이션 영화 '캣 비기'(제공=CJ ENM)

그러나 비용이 줄어든 자리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가장 큰 쟁점은 저작권과 데이터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기존 콘텐츠를 학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원저작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작가와 아티스트들이 AI 기업을 상대로 집단 소송에 나서며 학습 데이터 사용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3년 제기된 'Andersen v. Stability AI' 사건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사라 앤더슨 등 작가들은 스태빌리 AI(Stability AI), 미드저니(Midjourney) 등을 상대로 자신들의 작품이 동의 없이 대규모 데이터셋에 포함돼 AI 학습에 활용됐다고 주장했다. 텍스트 기반 AI에서도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작가 리처드 카드리 등은 오픈AI(OpenAI)와 메타(Meta)를 상대로 자신들의 저작물이 무단으로 수집된 데이터셋을 통해 학습에 사용됐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에는 AI 기업 앤트로픽(Anthropic)을 둘러싸고 저작권 및 보상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와 권리자들이 늘어나며, 논쟁은 개별 사건을 넘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핵심 쟁점은 AI 학습이 '참고'인지, 아니면 '저작권 침해'인지에 대한 법적 판단이다. 하지만 기술 구조상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쟁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의 저작권을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역시 기준이 불명확하다. 미국에서는 인간의 창작적 개입이 없는 AI 결과물에 대해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단이 나오면서 '창작 주체'에 대한 논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콘진원과 서울대, 카이스트, 한예종의 MOU 체결(제공=한국콘텐츠진흥원)

국내에서도 문제의식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국회와 정부는 간담회와 공청회를 잇따라 열며 제도 정비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AI 학습 과정에서의 저작권 보호와 창작자 보상 체계 마련을 주요 과제로 검토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역시 생성형 AI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정책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정책 대응은 단순한 규제 논의를 넘어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춘 인재 양성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AI 특화 콘텐츠 전문인력 양성 지원 사업'을 추진하며, 인공지능 기반 콘텐츠 산업에 대응할 인재 확보에 나섰다. 특히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과 협력해 이른바 'AI 콘텐츠 오케스트레이터' 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여러 AI 도구를 결합해 콘텐츠 제작 전 과정을 총괄하는 역할로, 기술과 창작을 동시에 이해하는 융합형 인재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AI 시대의 해법으로 통제 가능한 활용을 꼽는다. 학습 데이터의 출처를 명확히 하고 이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AI 학습에 활용된 창작물에 대한 보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AI로 생성된 콘텐츠에 대한 표시 의무화 역시 신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거론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AI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해정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