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조중연 2026. 4. 2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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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 장편소설 ‘남방여왕-괴물의 탄생’] ⑫나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연재 순서>

1 프롤로그_이성로 변호사
2 어두움의 끝_유령
3 육짓것의 시간
4 '게메'란 말은….
5 심층취재부
6 제주도판 '그것이 알고 싶다'
7 제주도 3대 영구 미제 사건
8 관덕정 살인 사건
9 유력 용의자의 등장
10 새벽의 루트
11 두 개의 모순점
12 나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13 신탁의 밤

"맞잡았다고?" 

강경식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가 누구하고? 지금 고스톱에서 서로 같은 패를 맞들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건가?" 

"누구겠어요? 진범과 김신덕이지." 

강경식이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도로 건너편으로 눈을 돌렸다. 둘은 식사를 끝내고 공설운동장 인근에 새로 생긴 CU편의점 노천카페에 앉아 있었다. 

건너편 암벽 등반 연습장에서 한 사람이 금속 볼트를 밟고 힘겹게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로프에 의지하여 대형 건물 유리창 닦듯 매달려 있는 사람도 보였다. 형형색색의 머리 보호 장구를 착용한 점이 특이했다. 옷보다는 헬멧으로 패션 증명을 하는 듯했다. 

"김신덕은 살인이 일어나던 그날 밤에 분명히 관덕정 인근에 있었어요. 그간의 범죄 내력을 고려하면 범행 대상자를 물색하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겠죠. 그 순간 김신덕의 레이더망에 택시에서 내리는 현씨와 고춘자가 걸려들었어요. 그런데 진범이 한 발 먼저 범행을 저지른 거죠. 손쓸 새도 없이 선수를 쳐버린 거예요. 김신덕이 잠재적 피의자에서 현장 목격자로 바뀐 순간이었죠." 

김수남은 무릎을 탁 쳤다. 흥미로운 가설이었다. 

"맞아. 골목 퍽치기에서 펜스 안의 살인, 그리고 현씨의 손가방을 태우고 펜스를 뛰어넘어 도망갈 때까지 숨어서 전 과정을 목격했던 거야. 그래서 현장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거고."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춘자의 휴대폰은 어떻게 된 걸까?" 

"관덕정과 펜스 사이 골목길이 어두웠던 까닭에 휴대폰을 집어넣는 진범의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요. 가방 태우고 도망치는 것까지는 목격했던 거고. 그러니까 김신덕은 고춘자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진범이 땅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는 장면도 보지 못했다, 이 말씀이죠. 진범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지켜봤을 테니까." 

김수남은 감탄하며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실마리가 이 가설 하나로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본 것 같은데. 경기남부연쇄살인 사건 때, 유영철이 정남규를 두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잖아." 

"나보다 더 센 놈이 나타났다?" 

강경식이 바로 대답했다. 

"왜 범죄자들은 기가 막히게 범행 대상이나 장소를 찾아내잖아. 후각 같은 촉이 발달한 거겠지. 오줌으로 자기 영역 표시를 해뒀다가 냄새로 나중에 찾아내는 개들처럼 말이지. 다른 맹수들은 주로 똥 냄새를 통해 상대방을 파악하고. 유영철은 정남규가 싸놓은 똥 냄새를 맡고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식했던 거야." 

"결론적으로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연쇄살인범들은 자기 나와바리에서만 범행을 했어요. 새로운 구역에 가면 거기를 거점으로 움직이는 범죄자의 미세한 똥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절대로 남의 구역에 침범하거나 발을 들이지 않았죠." 

"자기보다 더 세거나 적어도 비슷한 괴물이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웠겠지." 

"공교롭게도 진범과 김신덕은 한날한시에 아다리가 걸렸던 거예요. 둘 다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가 우연히 관덕정까지 흘러들었고. 만약 거기에서 둘이 스치듯 만났으면 틀림없이 서로를 알아봤을 거예요. 관심사가 같았으니까. 그 방면으로는 프로였으니까. 대리기사가 대리기사를 알아보듯 말이죠." 

"김신덕이 먼저 범행을 했으면 어땠을까?" 

"제 생각에는 진범이 김신덕보다 더 셌을 것 같은데요." 

"살인까지는 하지 못했을 거야. 김신덕의 스타일을 보면." 

"하지만 진범 역시 살인에 있어서만큼은 초짜였음이 분명해 보이죠. 프로라기보다는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배성훈 교수는 진범이 우발적으로 과도한 폭력을 짧은 시간에 행사했다고 분석했거든. 어깨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갔다는 뜻이지. 반면 미소카페 사건은 스타일이 다르다고 했어. 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시간을 들여가며 즐겼다는 거야. 바로 이 지점에서 확연히 범행의 지문이 갈리지." 

"이쯤 되면 관덕정 사건과 서귀포 사건이 동일범 소행인지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사건 발생 시각을 계산해보면 동일범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서귀포와 구제주 관덕정을 오가려면 한라산을 넘어야 하는데 통상 50분쯤 걸린다. 동일범이라면 5·16도로를 탔을 가능성이 높다. 평화로 쪽은 신제주를 통과해야 하므로 시간이 더 소요된다. 범인은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이동했거나 그 반대 동선으로 움직였을 수 있다. 

"미소카페 사건의 경우, 피해자 강정화가 카페의 종업원을 모두 퇴근시킨 시각은 2시쯤이었어요. 2시 10분쯤 어디론가 전화를 건 것이 마지막 행적이고. 강씨 혼자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는 뜻이죠." 

"2시 10분 이후 살해 당했다는 거잖아.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게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고." 

"약속이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죠. 강씨는 평소 자기가 먼저 퇴근했으면 했지, 종업원을 조기 퇴근시킨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관덕정 사건 발생 시각은 새벽 3시에서 3시 20분 사이다. 범인이 서귀포에서 제주시 관덕정으로 넘어갔다고 가정해보자. 가장 빠른 시각인 2시 10분에 살해했다 하더라도 관덕정에 도착하려면 50분~70분의 여유 시간밖에 없다. 거기에서 이동 시간 50분을 빼면 불과 20분 안에 범행하고 제주시로 넘어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강정화의 시체 훼손 상태를 볼 때 시간을 두고 공들인 게 분명하므로 상황과 맞지 않다. 

반대 상황도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범인이 관덕정에서 살인을 끝내고 서귀포로 넘어갔다면 새벽 3시 50분에서 4시 10분 사이가 된다. 그러나 2시에 카페를 닫은 피해자가 그 시각까지 범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경찰이 무대뽀로 수사했다 해도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죽이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언론이 나서서 연쇄살인이네 뭐네 하며 설레발치고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아요. 실은 어제 서귀포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를 만났어요. 그이가 사건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 사진을 보세요." 

강경식이 스마트폰을 꺼내 포토 갤러리를 열었다. 형사가 보관하던 사진을 직접 찍은 것이었다. 사건 파일에는 없는 사진이었다. 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정전기가 일어 머리카락이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나간 상태였다. 하얗게 분칠된 얼굴을 하고, 두 무릎은 세워져 M자로 90도가량 벌어져 있었다. 배에서 창자가 흘러나온 모습이 참혹해 보였다. 

그 순간 2006년 발생한 영등포 노들길 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여성을 살해하고 시체를 배수로에 버렸는데, 두 무릎이 접힌 채 M자로 벌어져 있어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사건이었다. 그 현장에서도 피해자의 머리카락이 정전기가 난 것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건 분명히 범인이 한 짓이겠지?" 

"뭔가 숭배하는 모습 아닌가요? 범인이 이렇게 전시하듯 머리카락을 펼쳐놓은 거예요. 진짜 괴물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프로파일링 교과서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자세잖아요. 성도착자들이 환장하는 자세라 말이죠." 

"그래서 배성훈 교수가 이 사건 현장이 서늘하다고 말한 거였어. 배 교수는 패턴을 읽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 사건 범인이 정말 위험한 놈이고, 풀기 어려울 거라고 프로파일링 했겠지." 

"이거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데요." 

"관덕정 살인 사건으로 내가 연재 시작할 테니까 자네는 미소카페 사건에 올인하라고.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꼼꼼히 검토해." 

"미소카페 사건은 수사 자료가 많지 않아요. 사람들 이목이 관덕정 사건에 몰려 있어서 다소 외면받은 측면도 있고. 열흘 뒤에 서귀포 다방 여종업원 살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수사력이 분산된 측면도 없지 않아요. 무엇보다 2006년 노들길 살인 사건의 피해자 자세가 10년 먼저 서귀포에서 시연되었다는 점이 충격이에요.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라 형사들도 당황한 것 같았고." 

"관덕정 사건처럼 수사를 흐트러뜨린 지점이 반드시 있을 거야. 김신덕의 거짓 자수 같은 계기가 말이지." 

"이따 퇴근하면 술이나 한잔하면서 얘기 더 하시죠?" 

"아, 미안. 저녁에 대리운전 나갈 거야. 며칠 동안 걷지 못해서 몸이 찌뿌드드해." 

"밤마다 전화기 꺼놓고, 취재는 나 몰라라 하고. 빡쎈 건 다 나 시키고. 신문사 퇴근하면 대리운전 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낼까 보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몽타주 자주 확인하며 삽시다." 

강 기자가 곰살갑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조중연.

조중연

2008년 계간『제주작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탐라의 사생활』,『사월꽃비』가 있다.

kalito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