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되지 않은 원인과 증명된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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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모든 질병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특히 희귀질환이나 자가면역질환의 경우 의학계조차 그 발병 기전을 '원인 불명' 혹은 '복합적 요인의 상호작용'이라는 모호한 영역에 남겨두곤 한다.
남극 기지 사례에서도 법원은 단순히 질병의 발병 원인 그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대원이 처했던 환경을 복합적으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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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모든 질병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특히 희귀질환이나 자가면역질환의 경우 의학계조차 그 발병 기전을 '원인 불명' 혹은 '복합적 요인의 상호작용'이라는 모호한 영역에 남겨두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학적 불확실성이 산업재해의 현장으로 들어올 때 발생한다. 근로복지공단은 흔히 "의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재해 보험의 영역에서 법의 역할은 과학의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채우지 못한 공백을 '규범'의 이름으로 채우는 데 있다.
우리 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기 위한 인과관계를 판단할 때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일관되게 판시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규범적 상당인과관계'다. 이는 인과관계의 유무를 사회 평균인의 관점이 아닌, 질병이 생긴 해당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법적 판단이다.
최근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근무하던 중 희귀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진단받은 한 연구대원의 사건은 규범적 상당인과관계 법리가 노동자의 권리 구제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공단은 해당 질환의 발병 원인이 불분명하다며 산재를 승인하지 않았으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의학적 인과관계의 완결성보다 노동자가 처한 '특수한 환경'에 주목했다. 설령 직접적인 질병 발병 경로를 과학적으로 특정할 수 없더라도, 특수한 업무 환경이 질병을 촉발하거나 자연적 진행 경과 이상으로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법원이 규범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복합적·누적적 작용'이다. 작업 환경에 존재하는 여러 유해요인이 개별적으로는 발병에 충분치 않더라도, 이것들이 중첩됐을 때 인체의 면역 체계에 미칠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극 기지 사례에서도 법원은 단순히 질병의 발병 원인 그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대원이 처했던 환경을 복합적으로 살폈다.
주 52시간을 상회하는 고강도 노동과 결원으로 인한 업무 과중, 그리고 폐쇄적 공간 내에서의 극심한 대원 간 갈등은 면역 기능을 저하시키는 강력한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또 일조량이 부족한 극한지 특성상 피할 수 없었던 비타민D 결핍은 신경 손상 회복 능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 위험 인자로 작용했다. 특히 통상 20~40대에 발병하는 질환이 만 50세를 넘긴 노동자에게 발현된 이례적인 양상은, 이 사건 상병이 자연적 발병이 아닌 열악한 업무 환경에 의한 '촉발 요인'의 결과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규범적 근거가 됐다.
산재보험법은 단순한 '보상법'이 아니다. 사회적 위험을 개별 노동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공동체가 나누어 가짐으로써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사회보장법'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사정은 노동자의 책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곤란한 경우일수록, 산업재해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해야 할 현실적·규범적 이유는 더욱 커진다.
'규범적 상당인과관계' 법리는 노동을 과학의 잣대로만 재단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법의 의지다. 과학이 "모른다"고 말할 때, 법은 "그럴 수 있다"고 답함으로써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산재보험법이 존재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의로운 노동 사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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