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다르다”는 믿음, 과연?···흥미롭고 섬뜩한 월스트리트 붕괴 이야기[책과 삶]

1929
앤드루 로스 소킨 지음 | 조용빈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 632쪽 | 3만2000원
1929년 10월24일 아침 뉴욕증권거래소 앞에는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자신들의 재산과 어쩌면 국가의 운명까지도 뒤흔들 개장 벨을 기다렸다. 오전 10시, 벨이 울리자 비명과 손짓,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소리와 함께 유혈 사태가 시작됐다. 전국에서 쏟아진 매도 주문이 눈보라처럼 시장을 덮쳤고, 증권사들은 증거금을 채우지 못한 고객의 계좌를 강제 청산하다 이내 원금 회수와 상관없이 어떤 가격에라도 팔아치우려했다. 그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한 이 최악의 하루는 ‘검은 목요일’로 불리며 증시 붕괴의 신호탄이 됐다.
1929년 10월24일부터 29일까지 뉴욕 증권시장을 휩쓴 주가 대폭락은 1930년대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의 도화선이 됐다. <1929>는 그 패닉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번영의 정점에서 파국으로 치달았던 자본주의의 가장 극적인 장면들을 복원해낸다. 뉴욕타임스 저널리스트 앤드루 로스 소킨은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베스트셀러 <대마불사>에 이어 8년에 걸쳐 쓴 <1929>에서 역대 최악의 시장 붕괴의 실체를 낱낱이 그려낸다. 만만치 않은 두께이지만, 박진감 넘치는 넷플릭스 시리즈처럼 앉은 자리에서 몰아보게 되는 금융 논픽션이다.
책은 1929년 2월의 불길한 징후부터 1933년 6월21일 위기의 주역 찰스 미첼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떠나가는 장면까지 52개월의 타임라인을 촘촘하게 재구성했다. 저자는 경제 지표를 나열하는 대신, 위기를 스스로 설계하고 파멸의 덫에 걸려든 ‘내부자들’의 드라마에 주목한다. 공격적인 투기를 주도한 내셔널 시티 은행(시티은행의 전신)의 찰스 미첼 회장, 막후 실세였던 JP모건 사람들, 무모한 공매도를 시도하던 전설적인 투기꾼 제시 리버모어 등 월스트리트 거물들의 야망과 기만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장기 호황이 이어지던 1920년대 미국은 자동차, 세탁기 등 현대 소비 경제가 탄생한 시기였다. 그리고 ‘라디오’라는 신기술이 세상을 뒤바꾸고 있었다. 당시 가정용 라디오가 수백만대 팔리고 청취자가 3800만명으로 늘어나는 등 미래의 잠재력은 무한한 듯 보였고, 주가도 그랬다. 라디오 회사 RCA는 주가가 1921년 1.5달러에서 1928년 85.5달러로 급등했고, 큰손들의 통정매매로 1929년 3월 109.25달러까지 찍었다.
이러한 풍요를 가능케 한 주역은 ‘지금 사고 나중에 갚는’ 신용이라는 마법이었다. 당시 중산층이면 주식 구매액의 10%만 내고 나머지는 빌리는 극단적인 레버리지를 쓸 수 있었다. 성장에 대한 탐닉은 맹목적인 투기로 변질됐다.
“유혹은 수천년간 인류의 어리석음을 부추겨왔다. 그것이 에덴동산의 뱀이든, 암호 화폐든, 인공지능이든 상관없다. 새로운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으므로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라고 굳건히 생각한다. 그러나 비극은 반복된다. 1929년에도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시장이 붕괴의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도, 이런 과열이 무모한 투기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1907년 공황 이후 미국은 연방준비제도(Fed)를 만들었고, 금융 시스템이 안전해졌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경제의 펀더멘털 역시 견조해 보였다. 하지만 파국의 전조는 그 믿음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뉴욕증권거래소 소장 리처드 휘트니는 대중 앞에선 시장의 건전성을 역설하면서도 뒤로는 고객 자산을 빼돌려 투기를 일삼았다. 월스트리트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던 찰스 미첼은 무모한 투기와 이해상충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계열사를 동원해 주가를 띄우고 위험한 증권을 대중에게 떠넘겼을 뿐 아니라, 막대한 세금을 피하기 위해 손실 난 주식을 아내에게 넘기는 위장 매매까지 벌였다. JP모건을 비롯한 거대 은행들은 정계 유력자들에게 뇌물에 가까운 특혜 주식을 배정하며 규제의 칼날을 무디게 했다. 연준은 관망 속에 골든타임을 놓쳤고, 허버트 후버 행정부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던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거품이 터진 뒤 그 충격은 보통 시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1932년 주가는 1929년 정점 대비 80% 이상 폭락했고, 1만1000개에 달하는 은행이 문을 닫았다. 약 1300만명의 미국인이 일자리를 잃어 실업률은 23.6%까지 치솟았다. 사람들은 양철 오두막에 몸을 누이고 무료 급식소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부랑자들은 철도를 따라 떠돌았다. 뼈아픈 반성과 제도의 전환도 뒤따랐다. 청문회를 통해 금융권의 추악한 관행이 드러났고, 이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한 글라스-스티걸법과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현대 금융 시스템의 기틀을 마련했다.

새로운 기술과 부의 약속, 그리고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시장을 달아오르게 하는 풍경은 지금도 낯설지 않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연준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인공지능(AI)을 둘러싼 장밋빛 전망은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대중투자자들의 열기, 정치의 난맥상, 규제와 시장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1929년의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바꿔놓는다. AI를 둘러싼 기대가 산업 전반과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한국에도 이 책은 오늘의 낙관을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저자는 1929년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비이성적 과열에 대한 치료제는 규제도 아니고 의심도 아니며, 바로 겸손이다. 즉 어떤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으며, 어떤 시장도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세대도 예외일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우리가 가진 확신의 높이가 높을수록, 우리는 더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추락한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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