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친미, 반미, 용미 넘나들었다? 박정희의 ‘국익 우선 對美정책’

도대체 대한민국 정치에서 미국이란 무엇인가, 이런 탄식이 나올 지경이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야당 대표가 불투명한 일정의 장기 미국 순방을 다녀오고서도 기세가 등등하다. 민감한 북핵 정보를 통일부 장관이 공공연히 언급한 것을 두고 한·미 정부 간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럴 때 살펴보고 싶어지는 것이 과거사다. 박정희는 미국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저 친미주의자였나? ‘박정희의 시간들’을 쓴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이렇게 분석한다. “박정희는 반미(反美)와 친미(親美), 용미(用美·미국을 이용함)와 비미(批美·미국을 비판함)를 때에 따라 넘나들며 대처했다.”
위관급 장교 시절 박정희는 친공·반미 성향의 반골이었다. 미국과 전쟁을 치른 일본군 장교 출신인 데다, 맏형 박상희가 미 군정 시절 대구폭동 당시 좌익 활동을 했다가 살해당한 영향이 컸다. 육사 졸업 후인 1946년 12월 춘천 8연대에 배속됐을 때 연대장 원용덕 대령 주제로 경비초소와 소대장 배치 장소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미국 고문관 브라운이 참견하자 박정희 소위는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미국 놈이 왜 간섭하는 것이냐!”
원용덕 대령이 “장교들도 이제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자 박정희는 정색을 하고 대들었다. “이게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 군대입니까?”

5·16 직후인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1917년생 동갑내기인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게 됐다.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체구가 훨씬 큰 케네디 앞에서 박정희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 아메리카’라는 당시 미국의 국산품 애용 정책 때문에 한국 수출이 지장을 받고 있다며 “리그렛(regret·유감이오)!”이라 일갈하는가 하면 “월남에 한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는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이때 월남 파병 제의를 했다는 사실은 비밀 문서 속에 묻혀 있다가 1996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1966년 10월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과 시민 100만명을 거리에 동원하는 파격적인 환대를 했다. 존슨으로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장관이었는데, 감격한 나머지 박정희에게 이런 덕담을 했다고 한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오…. 한국은 머지않아 선진국이 될 것이오!”

이 무렵 필리핀 마닐라에서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존슨은 노골적으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을 무시하고 박정희에게 친밀감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한다. 존슨 재임 중 그의 지원과 비호로 인해 박정희는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의 고도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다음 미 대통령 닉슨의 아시아 전략 수정은 한국에겐 불길한 조짐이었다. 닉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66년 9월, 박정희는 방한한 닉슨을 ‘이미 정치 생명이 끝난 사람’으로 오해해 청와대에서 잠시 커피 타임만 가지는 홀대를 했다. 1968년 닉슨이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는 닉슨을 만나고자 했는데, 이번엔 닉슨이 복수를 했다. ‘휴가 때 샌프란시스코로 가는데 그때 오든지…’라는 것이었다.
1968년 8월 21일 아쉬운 입장의 박정희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왔다. 그러나 닉슨은 호텔 로비나 엘리베이터는 물론 방 앞에서도 영접하지 않았다. 큰 방을 가로지르고 난 다음 방 끝에 서 있었다. 마치 황제를 알현하러 간 제후 같은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저녁 만찬 때 닉슨은 자신의 고향 친구들까지 불러다 앉히고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여러 사람 면전에서 모욕을 준 셈이었다. 이렇게 열린 정상회담에서 닉슨은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 안심시켰으나 그 뒤엔 철군을 시사해 박정희의 대미(對美) 불신을 깊어지게 했다.

이후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이나 미·중 수교 같은 미국 아시아 전략의 전개를 볼 때, 주한미군이 모두 철수할 날이 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대안은 자주 국방력을 갖추는 것과 핵무기의 개발이었다.
미 행정부를 믿지 못하게 된 박정희는 안전책으로 미 의회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국식 로비를 펼치려 했다. 이것은 ‘코리아 게이트’라는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망신만 당한 채 실패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뒤 포드 대통령 때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1976년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으로 한·미 관계는 다시 결속됐다.

하지만 1977년 1월 지미 카터가 새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한·미 관계는 다시 갈등으로 치달았다. 인권 문제를 내세워 박정희를 견제하면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라는 카드를 내걸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NATO와 더불어 소련 세력을 견제하는 미국 세계 전략의 2대 근간이 바로 주한미군’이라는 전략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공개 석상이 아닌 자리에서 이렇게 카터를 비판했다.
“제 나라 세계 전략 실체가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변두리 조지아주 출신 땅콩 장수 한 명이 대사(大事)를 그르치고 있다.”
1979년 6월 박정희와 카터는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터의 기싸움은 대단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 정부의 의전 절차를 무시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의정부 미군 기지로 가겠다고 우겼다. 카터는 방한 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에게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지 않도록 한국 정부를 사전에 납득시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 통보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역관에게 자신의 주한 미군 철수 반대 논리를 미리 숙지시키며 벼르고 있었다.
카터와 마주 앉은 박정희는 45분에 걸쳐 철수 불가론을 강의하듯 설파했다. 짜증이 난 카터는 종이 위에 낙서를 하며 화를 삭였고, 미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참모와 대사에게 큰소리를 냈다. 글라이스틴이 박정희의 주장을 부연 설명하자 그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오인환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가 카터에게 무례하게 보일 장광설을 펼친 것은 나름 승산이 있다는 실용주의적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 소신과 배짱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있는 시도가 아니었다.”
당시 미 정부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원하는 사람은 카터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이다.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은 물밑에서 카터의 지시를 번복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베시 미8군 사령관은 아예 한국 측을 상대로 카터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카터는 반공 노선의 우방 독재체제에 대해서만 엄격했을 뿐, 좌익 독재체제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양자 모두에게 불쾌했던 정상회담이 3주 지난 7월 20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이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 발표했다.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균형이 회복되고 긴장 완화 조짐이 발견될 때까지 주한미군의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한다.” 1980년에 카터는 재선되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는 사실상 1979년 7월에 철회된 것이었다.
전술과 전략에 밝은 박정희는 자국의 세계 전략에 어두운 카터를 상대로 철수 불가론을 밀어붙여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터의 ‘뒤끝’은 만만치 않았다. 그해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한국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후임인 레이건이 그 일을 넘겨 받아 한국을 비핵화국가로 못박았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핵 개발 정책을 포기하게 된 한국은 당연히 챙겼어야 할 ‘핵 포기의 대가’를 얻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박정희 사후(死後)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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