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컷] 사람이 그리우면 시골 장터로 갔다
가볍게 한 장 34. 사진가 정영신 ‘장날’ 사진전

한겨울 외투를 입은 어머니들이 집으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바구니 가득 장에서 산 것들을 들고서. 흰 눈까지 내려 정감이 넘치는 이 따뜻한 사진은 우연히 지나가다 찍힌 것이 아니다. 사진을 촬영한 정영신(68) 사진가는 40년 동안 600곳이 넘는 전국 5일장을 찾아다니며 장날 사진을 찍었다. 2010년 경북 영천장 앞에서 촬영했다.

서울 강남대로의 갤러리 스페이스22에서는 요즘 정영신의 ‘장날’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동네마다 있는 마트와 온라인 새벽 배송까지 되는 이 시대에 누가 시골 5일장을 찾아갈까? 어떤 사연이 있기에 40년 동안 시골 장터를 찾아다녔을까?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정 씨에게 장날은 “축제”였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른들이 함께 보따리를 이고 장을 가면 아이들은 쫓아가다 혼나서 돌아오고, 오늘은 엄마가 뭘 사 오시나 목 빠지게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도 귀하던 시절 어쩌다 장을 가면 항상 먹을 게 많았다.


장터 엿장수가 가위를 치는 박자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했다고 회상했다. 천막극장에선 심순애 스토리가 나오는 연극도 열렸고, 농한기인 겨울엔 하루 종일 놀다 왔다고 했다. 그렇게 장터를 가면 논밭에서 일하다가 막걸리 한잔 마시러 오는 사람과 함께 마시고, 장이 파할 때까지 어슬렁거리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친구가 되었다.


이십대 초반 시절 신춘문예에 번번이 떨어지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 무작정 시골 장터를 찾아갔다. 정 씨는 연암 박지원이 저잣거리를 찾아 평범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우울증을 치료했다는 글을 언젠가 읽었다고 했다. 1986년 겨울 삼베로 유명한 나주 다시장을 갔다가 장에 구경 나온 한 할머니가 “줄 것이 있으니 다음 장날에 꼭 여기서 다시 보자”고 해서 다음 장에서 찾아갔다. 다시 만난 할머니는 손수 말린 고사리 나물을 한 봉지를 건넸다. 그 한마디가 40년 넘게 장터를 찾게 한 계기였다고 사진가는 말했다.


사진가는 자신이 장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1980년대 도시는 산업화로 빠르게 변했지만, 시골 장터는 느리게 움직여도 지역 경제를 움직이던 공간이었다고 했다. 시골 장터에서 상인과 손님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데 그치지 않았다. 서로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이번 사진전에 소개된 100장이 넘는 사진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25년까지 장날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흥정하고 막걸리도 마시는 소통의 풍경이다. 사진가는 주머니 안에 자신이 피우지도 않는 담배와 사탕을 늘 갖고 다녔다. 장터에 오는 사람들에게 담배와 사탕을 권하며 친해졌고, 한참 이야기한 후에 허락을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지방 소멸 위기인 요즘 시골 장터는 어떨까. 사진가는 면 단위마다 있던 5일장도 점점 사라지고 군 단위로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터 풍경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물건만 사고 바로 나오는 마트와는 다른 시골 장터는 이제 오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천 원어치 도라지를 사도 안부를 묻고, 뭘 안 사도 한참 얘기하는 모습을 지금도 본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의 현실은 장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 오면 친구라도 우연히 만나지 않을까” 하고 오는 90대 노인을 만난 적도 있다. 70년 된 단골손님과 장꾼(상인)이 두 나무처럼 말없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고 했다. 과거에 5일장에서 지역 특산품이 팔리던 시절은 옛날이 되었지만, 여전히 지역 제철 음식은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며 사진가는 4월과 5월인 바로 지금이라고 했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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