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손등에 화장품 발라주는 ‘스킨십 마케팅’의 시초 에스티 로더

이한수 기자 2026. 4. 2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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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04년 4월 24일 96세
에스티 로더(왼쪽).

글로벌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에스티 로더(1908~2004)는 직접 만든 화장품을 뉴욕 헤어 살롱에서 고객 손등에 발라주며 명성을 얻었다. 38세 때인 1946년 남편 조셉 로더와 함께 회사를 세웠다. 1970년 설문에서 ‘여성 실업가 톱 10’에 꼽힐 정도로 성공했다. 함께 이름을 올린 이는 캐서린 그레이엄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올리브 앤 비치 비치크래프트 항공사 사장 등이었다.

1981년 그의 성공 스토리가 신문에 실렸다. 에스티 로더 화장품이 한국에도 들어오기 전이었다. ‘아름다움에의 여로: 화장품에 신들린 사람들’ 기사에서 “창업 35년 만에 세계적 인물로”라고 소개했다. 기사는 2회에 걸쳐 실렸다.

1981년 4월 4일자 10면.

“1946년으로 잠시 되돌아가보자. 지금부터35년 전. 그해, 에스티 로더는 큰외삼촌인 피부과 의사 존 샤츠 박사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엔나유(流)의 크림, 클렌징 오일과 크림팩을 만들어 팔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35년. 겨우 35년이 지난 오늘, 에스티 로더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에스티 로더 화장품의 이름은 세계 여러 나라 상류사회 여성들 사이에는 마치 ‘미(美)의 여신’의 이름처럼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1981년 4월 4일 자 10면)

기사는 1981년 현재 “해외70개국에서 고급 화장품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지만 이런 모든 일이 한 여인이 불과 4분의 1세기 동안에 이룩해 놓은 사업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사람들은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초기 10여 년간 사업은 쉽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1981년 4월 11일자 10면.

“제품의 품질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진 에스티는 판매 루트의 개척에 온갖 힘을 다 쏟은 끝에 드디어 고급백화점 색스 피프드 아베뉴에 판매 코너를 마련하게 된다. 1948년에 이룩한 첫 성공이었다. 그러나 창업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50년대 중반을 지나서도 연간 매상은 겨우 85만달러에 불과했고 종업원 역시 모두 합쳐 봐야 단 5명뿐이었다. 판매 매상액이 1백만 달러를 넘어선 것은 창업 후 14년째가 되는 1960년이었다고 하니까 그동안의 고생은 대단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괴롭고 쓰라린 14년간, 에스티는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고급 화장품이라는 자세를 꿋꿋이 지켰다. 다행히 1955년에 발매한, 향료가 든 목욕용 오일 ‘유스 듀’가 선풍적으로 팔리기 시작하자 에스티사는 오늘의 발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1981년 4월 11일자 10면)

1988년 5월 8일자 7면.

신제품 ‘유스 듀’는 “하루 종일 향기를 지속시켜 주는 목욕 오일”로 입소문을 탔다. 당시 향수는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선물이란 인식이 강해 여성이 스스로 구매하는 일은 드물었다. 반면 ‘목욕용 오일’이라고 마케팅한 ‘유스 듀’는 여성이 구매하는 생필품 같은 ‘일상의 사치품’이었다.

에스티 로더는 창업 42년 만인 1988년 한국 시장에 상륙했다.

“크리스찬 디오르, 랑콤에 이어 미 에스티 로더가 우리나라에 상륙, 이들 세계 화장품 업계 대표사(社)들의 경쟁이 국내 시장에서도 뜨거워질 전망이다.(…) 지난해 매출액 15억달러로 외형만으로는 세계 최대 화장품 업체인 에스티로더사(社)는 이미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이지만 우리나라 진출에는 꼬박 5년이 걸렸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큰 시장인 우리나라에 상륙하기 위해 83년부터 문을 두드렸으나 보사부 수입 허가 기준과 수입 금지 품목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다 86년 화장품 전 품목 수입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국내 진출에 성공했다.”(1988년 5월 8일 자 7면)

1994년 10월 17일자 13면.

기사는 창업자 에스티 로더에게도 주목했다.

“에스티 로더사(社)는 창업자인 에스티 로더(80·여·본명 에셔 멘처)의 개성과 판매 전략으로도 유명한 기업이다. 에스티 로더는 ‘미국에서 가장 콧대 높은 여자’로 불리면서, 고급 화장품업으로 입신키 위해 동구 유태계 이민이란 신분과 본명을 숨겨 상류 사교계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극히 최근에야 출신 성분과 본명을 밝혔다. 그녀는 ‘권위와 명예’를 화장품 판매 전략으로 채택, 각국에 판매 루트를 1~2곳으로 극히 한정했으며, 우리나라에도 롯데쇼핑 외에 곧 완공될 롯데월드 등 2곳에만 매장을 설치한다는 계획이다.”(1988년 5월 8일 자 7면)

회사 경영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졌다. 아들 레너드 로더 회장은 1994년 방한 인터뷰에서 에스티 로더 그룹의 독특한 경영 전략으로 “계열사 간 독립성을 철저히 유지해 같은 계열사끼리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도록 한다”(1994년 10월 17일 자 13면)고 밝혔다.

2004년 11월 5일자 B1면.

손자 윌리엄 로더 CEO는 2004년 방한 인터뷰에서 할머니 에스티 로더의 ‘스킨십 마케팅’을 회고했다.

“할머니는 여자들의 손을 끌어다, 그들의 손등에 직접 크림을 발라주셨습니다. 그리고 제품을 느껴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아는 한, 화장품 마케팅에서 가장 먼저 스킨십을 도입하신 분일 겁니다.”(2004년 11월 5일 자 B1면)

에스티 로더는 2004년 4월 24일 96세로 별세했다. 부음 기사는 “화장품 업계의 거장 로더가 심폐 기능 장애로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24일 숨졌다”고 전했다.

2004년 4월 27일자 A27면.

“체코계 아버지와 헝가리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더가 뉴욕에서 ‘화장품 장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화학자인 삼촌이 마구간에 차린 실험실에서 만든 미용 크림을 미장원 등에 팔러 다니면서부터였다. 피부 미용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이후 틈날 때마다 부엌에서 미용 재료를 혼합해 크림을 제조했고, 이를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고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품질 좋은 제품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다음부턴 제품이 말한다”는 게 로더의 신념이었다. (…)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항상 화사하고 생기가 넘쳤던 로더는 생전에 “아름다움은 태도에서 비롯된다”며 “다른 비결은 없다”고 강조했다. “왜 신부들은 모두 아름다울까요? 결혼식날에는 자기 외모를 가꾸기 때문이죠. 타고난 추녀는 없어요. 외모를 가꾸지 않거나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죠.””(2004년 4월 27일 자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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