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여자'에서 벗어난 순간… 무대의 중심에 선 여성들
악을 택하고 무대를 장악한 여자들
뮤지컬 '홍련'과 '렘피카'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꽤 오랫동안 무대 위 여성들은 희생할 때 고귀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견디고 사라지는 존재들. 최근 공연계에서는 이 같은 여성 서사의 기본 문법을 부수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진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인물들이 무대의 중심에 서고 있다.
뮤지컬 '홍련'(5월 17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작 배시현·작곡 박신애·연출 이준우)과 '렘피카'(6월 21일까지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 작 칼슨 크라이저·작곡 맷 굴드·연출 레이첼 채브킨)는 그 변화의 흐름에 선명한 방점을 찍는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좋은 여자'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스스로 악의 자리를 택하고, 사랑보다 자신의 선택을 앞세운다. '나쁜 여자'라는 낙인을 감수함으로써 무대의 중심을 차지한다.

"목이 아니라 턱을 부술 걸 / 발로 짓이겨 혀를 찢을 걸(…)"
익숙한 '장화홍련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의 홍련이 록 사운드 위에 거친 언어를 입힌다. 설화 속 홍련은 계모의 학대 속에서 언니를 따라 죽음을 택한 피해자다. 그러나 뮤지컬 ‘홍련’은 이 인물을 뒤집는다. '장화홍련전'과 '바리데기' 설화를 결합, 사후 재판이라는 설정 속에 그를 저승 재판소 천도정에 세운다. 열여섯 살에 혼백이 된 홍련은 "내가 아버지와 동생 장쇠를 죽였다"며 피해자이기를 거부하고 가해자 서사를 선택한다. 변호가 아닌 자백, 호소가 아닌 단죄의 언어를 쏟아낸다.
스탠딩 마이크를 놓고 고음의 록 음악을 뿜어내는 이 낯선 홍련의 등장은 이유가 있다. 극이 진행될수록 뮤지컬의 홍련과 설화 속 홍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점차 드러나는 것은 살인의 증거가 아닌 가정폭력 속에서 길들여진 홍련의 무력감과 자기혐오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과 조건부 사랑 속에서 자란 소녀는,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그 침묵은 언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홍련은 스스로를 가해자의 자리에 둔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책임을 떠안기 위해서다.

천도정은 처벌의 공간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게 하는 공간이다. 바리와 차사들은 판결을 내리기보다 홍련이 자신의 말을 찾을 때까지 재판을 반복한다. 수없이 이어지는 재판은 한 인간이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건이 아닌 감정의 실체다. 홍련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무너뜨렸을 뿐이다.
뮤지컬 '홍련'은 '약자의 목소리는 왜 늘 사후에야 들리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홍련은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 말할 기회조차 없었던 인물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빌런화하는 과정에서만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가해자라는 망상적 자기 선언은, 침묵 속에 있던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홍련이 택한 빌런의 얼굴은 타인을 향한 악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가 자신에게 휘두른 비정한 위로의 방식이다.
욕망을 멈출 줄 몰랐던 렘피카

뮤지컬 '렘피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쁜 여자를 만든다. 러시아 혁명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폴란드 출신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한 예술가가 자신의 이름을 '작가'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모든 것을 잃고 파리에 도착한 렘피카에게 그림은 생존 수단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생계를 넘어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 된다. 그는 상류층 초상화를 그리며 빠르게 이름을 알리고 스스로를 스타 화가로 만들어간다.
무대는 렘피카 회화의 특징인 아르데코 양식을 차용해 직선과 곡선이 반복되는 구조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 구조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조명과 인물 배치의 변화로 장면의 밀도를 조절한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축은 사랑이다. 렘피카는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사랑했다. 남편 타데우스와의 안정된 관계, 그리고 창부 라파엘라와의 관계. 라파엘라는 당대 사회에서 드러낼 수 없는 존재였다. 렘피카 역시 그 관계를 숨긴다. 전시회에도 함께하지 못하게 할 만큼 분명히 선을 긋는다.
하지만 관계를 지우지는 않는다. 라파엘라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렘피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라파엘라를 응시한다. 이는 완전히 억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남아 장면의 긴장을 만든다. 이처럼 여성 간 관계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형상화되는 방식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와 별개로 관객 반응이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막상 렘피카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쪽을 택한다. 누군가의 아내나 연인이 아니라 작가로 남는 길이다. 당대의 기준에서 이는 분명 나쁜 여자의 선택이었다. 결혼 제도를 벗어나고, 관계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우는 여성. 그러나 같은 선택을 남성이 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브로드웨이 일부 평단이 렘피카를 ‘자기중심적’이라고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초 내한해 한국 초연 리허설을 직접 지휘했던 연출가 레이첼 채브킨은 이를 두고 "여전히 남성 중심의 빌런 서사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욕망은 카리스마로 읽히지만, 여성의 욕망은 결함으로 해석된다는 지적이다.
홍련과 렘피카는 이 오래된 기준에 맞선다. 두 인물은 모두 주어진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홍련은 스스로를 가해자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말하기를 택하고, 렘피카는 사랑과 관계보다 자신의 이름과 작업을 앞세운다. 이때 '빌런'은 캐릭터 성격이 아닌 규범을 벗어난 선택에 붙는 이름이 된다. 희생하지 않는 여성, 사랑에 소진되지 않는 여성, 자신의 욕망을 우선하는 여성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이전과 다른 기준으로 비난의 시선을 받아 왔다. 홍련과 렘피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감수한 채 끝까지 나아간다. 그렇게 두 인물은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타인의 서사를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결정하는 존재로 남는 것. 무대 위 여성은 더 이상 용서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하고, 감당하고, 필요하다면 나쁜 여자로 불리는 것까지 떠안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갖는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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