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북한을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

이일규 前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치참사 2026. 4. 2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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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사진은
北 외교와 대남정책의
향방을 보여주는 단서
대미관계 여전히 중시
남북관계 봉인된 것 아냐
원칙 지키되 접점 찾길
2026년 3월 24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최고인민회의 직후 기념사진. 김정은(앞줄 가운데)이 외무성 주요 간부들, 해외 주재 대사들과 함께 서 있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 제15기 최고인민회의 이후 공개된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정은이 외무성 주요 간부들, 해외 주재 대사들과 함께 찍은 이른바 ‘기념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들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낯익은 외무성 부상, 해외 대사 얼굴들 사이에서, 내가 만약 북한 체제를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자리에 서 있을지 떠올렸다.

그러나 개인적 감회를 넘어, 이 사진은 북한 외교와 대남정책의 향방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김정은 바로 옆에 유엔 등 다자 외교를 총괄하는 김선경 외무성 부상이 서 있다. 북한이 중·러의 전략적 후원을 배경으로 국제 무대에서 다자 외교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과거에 중·러 주재 대사들에게만 부여되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우리의 국회의원) 배지를 김성 유엔 대사에게도 달아준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미국·러시아·중국 담당 부상들을 차례로 배치한 것을 보면, 북한 외교가 ‘대국 외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미국 담당 부상이 중앙 가까이에 자리한 점은, 북한이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북한은 5월 미·중 정상회담 결과를 지켜본 뒤, 그 결과 여부에 따라 미국과의 협상 여부를 신중히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대남 정책도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북한 외무성 1부상에 임명된 장금철은 거친 표현의 대남 발언을 쏟아냈다. 불과 며칠 전 김여정의 비교적 온건한 대남 메시지와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향후 대남 관계를 주도할 사령탑이 자신이라는 ‘등장 선언’으로 보인다. 시작이 너무 호전적이어서 남북 관계가 결코 순탄치 않겠다는 우려도 든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장금철이 정작 김정은과 외무성 장·차관급 간부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남북 관계를 ‘국가 대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고착시키려 하지만, 실상은 여전히 노동당 중심의 특수한 틀 속에서 대남 정책이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중 관계에서도 전략적 움직임이 감지된다. 북한과 중국 간 열차 운행 재개에 이어, 얼마 전에는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방북해 김정은과 최선희 등을 만났다. 북한 측은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해 공동 이익 수호, 상호 협력, 다자 국제 질서 수립을 주장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중국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해주면서 양자 관계 회복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중국 측은 국제 정세 변화에 무관한 ‘북·중 친선 고수·공고·발전’을 강조했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곧 열리게 될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을 지렛대로 협상력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북·중은 왕이 외교부장의 방북을 계기로 양측의 대미 전략과 관련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공유하고, 향후 대응 방향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이후 9년 만에 중국을 방문한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가운데, 이란 전쟁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그동안 베네수엘라·이란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며 자제하던 군사적 도발 수위를 조금씩 높이고 있다. 이것이 독자적 판단인지, 중국의 청탁에 따른 전략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러시아에 이어 중국까지 등에 업으며 자신감을 얻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정부의 대응은 현실적이고 냉정해야 한다. 당장 전면적 남북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보다는, 단계적 신뢰 구축을 위한 공간부터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미·중 정상회담과 북·미 관계는 중요한 변수지만, 여기에 과도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강력한 한미 동맹, 한·미·일 공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안보의 핵심 축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부활하고 국제 질서가 흔들리는 지금,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한·중 관계, 한·러 관계도 전략적으로 유연하게 관리해야 할 변수임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의 ‘두 국가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 원칙을 지키되 접점은 찾아내자. 남북 관계는 지금 ‘닫힌 문’처럼 보이지만, 북한의 최근 행보는 그 문이 완전히 봉인된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심을 유지하면서 전략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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