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자존감의 목소리
나아질 거란 믿음 속에 ‘자신’이란 꽃 피워내야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한때 ‘자존감’이 유행이었다. ‘자존감’이란 말의 인플레이션이 심해 서점에만 가도 관련 책 제목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자존감은 높아졌을까.
진료실에서 요즘처럼 어깨가 축 처진 분들의 쪼그라든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떤 외부 요인이 사람들을 이토록 주눅 들게 만드는 걸까. 분명한 건 체감경기가 뉴스로 전해지는 것보다 심각하다는 것, 올해 들어 경제난으로 자살을 언급하는 내담자들을 며칠에 한 번꼴로 만난다. 또한 추측건대,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 역시 간접적으로 자존감을 위협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파괴된 건물과 사망자 숫자를 컴퓨터 게임을 하듯 무기력하게 지켜본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 마땅하지만, “힘의 논리 앞에서 사람이 물건 거래하듯 취급되는 것 같아요.” 어느 내담자의 말이다.
자존감은 사람들 마음의 코어 근육에 해당하는 것 같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신의 실패와 고통을 끝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봐야만 하는 시간을 살게 된다. 타인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며 사소한 일의 유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진료실에서 자주 목격한다. 옆집 개에게 물리고 우울증이 악화된 중년 여성분은, 자신이 얼마나 못났으면 개까지 나를 무시해서 물었을까 자책했다. 그저 운이 나빴을 거라 말해도 그분은, 개가 눈치챘을 정도의 하찮은 인간이란 생각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굳게 믿던 20대 여성분은, 애인이 생기면 끊임없이 테스트를 했다. 나를 사랑하는 게 진심이야? 나에게 실망해도 떠나지 않을 거야? 의심하면서 애인을 성자 수준까지 몰아붙였다. 남자는 사랑과 별개로 가혹한 테스트에 지쳐서 떠났을 테지만, 그럴 때마다 여성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내가 옳았어요. 역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자신감과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말이다. ‘자신감’은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고, ‘자존심’은 비교나 경쟁에서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평가 주체가 외부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감이 ‘넘친다’고 말하고 자존심이 ‘세다’는 표현을 쓴다. 이와 구별되는 ‘자존감(self-esteem)’은 무엇인가. 독자는 ‘나 자신이 얼마나 마음에 드나. 얼마나 가치 있게 여겨지나’라는 질문을 떠올려보자. 그때의 주관적인 느낌이 현재 자존감 높이와 비슷하다. 겉으로 자신감 넘쳐 보이는 ‘나르시시즘’과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공감 결여에 자기중심적 우월감으로 타인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주변에 있다면 피곤해지고 그가 힘을 갖게 되면 위험해질 수 있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는 폭언을 하는 사람은 어떠한가.
자존감이 약한 분들 중에는 누군가 자신을 지독하게 증오한 경험을 가진 사례가 많았다. 가족에게서 받은 차별 대우나 학교에서의 따돌림, 사회에서의 모욕과 괴롭힘이 자존감을 훼손하는 건, 의견을 비판받는 것과 존재를 거부당하는 게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네 생각이 틀렸어’가 아니라 ‘너는 틀려먹었다’는 거부는, 거부당한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끊임없이 싸울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만든다. 한 번은 증오의 이유를 오랫동안 찾던 남성분과 얘기를 나누었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나를 미워했을까요.” 마침내 우리가 마주한 대답은, 사소한 이유였거나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 어쩌면 상대는, 그를 향하던 증오가 사라지면 자신의 고통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미워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떻게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 자존감이 허약한 분들은 자신의 약점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그것을 감추거나 보완하는 데 에너지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단점이 많아도 괜찮고 경쟁에서 져도 된다. 자존감은 고정불변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건 약점을 없애서 흠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장점을 찾아 아끼면서 자신이란 꽃 한 송이를 피우는 일이 아닐까.

우린 종종 일어나지 않은 내일을 먼저 산다. 내일의 수치와 고통, 일어나지 않은 낭패의 표정까지도. 오지 않은 내일의 두려움으로 현재의 자신을 미워하거나 이미 도달한 오늘 하루를 외면할 필요가 없다. 자존감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도착이 아니라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을 때 찾아오듯 자존감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에 이를 거라는 믿음 속에서 자라지 않을까. 조금의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자신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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