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에도 후회 없이 살려 히말라야 5천m 고개 10회 올라”

강성만 기자 2026. 4. 2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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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산문집 두권 낸 박용일 변호사
최근 산문집을 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창립회원인 박용일 변호사가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올해 만 80살인 박용일 변호사에게 사람은 “누구나 소우주인으로 별나게 살아간다.”

그가 최근 펴낸 산문집 ‘박용일 변호사의 인생이력서’(전 두권) 부제도 ‘강원도 감자바위의 별난 삶이야기’와 ‘지구별 여행자의 별난 여행기’다.

1권에는 강원도 강릉 강동면에서 나 초등생 때 부모를 잃고 가난 속에서도 누이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해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인권변호사 2세대로 활동하고, 2006년 우주인 모집에 도전한 것을 계기로 예순 넘어 보스턴과 베를린 대회 등 마라톤 풀코스를 100회 이상 완주한 인생 이력이 담겼다. 2권에는 팔순 기념으로 지난해 감행한 ‘히말라야 5300m 이상 패스(고개) 10회 등반’ 등 주로 인생 후반부에 왕성한 의지와 체력으로 세계의 산과 길을 누빈 여행기 27편이 실렸다.

그는 76살에 박물관·미술관 100곳 관람을 목표로 ‘서유럽 50일 나홀로 배낭여행’을, 78살에는 ‘70일 동유럽·발칸 나홀로 문화기행’도 했다.

“국외 배낭여행 때는 가급적 한인 민박집을 이용해 도시락까지 싸달라고 합니다. 그래야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하나라도 더 볼 수 있거든요.”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박 변호사를 만났다.

지난해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각 3패스 트레킹 때 찍었다. 박용일 변호사 제공

그는 지난해 가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각각 3패스와 틸리초 트레킹’에 나서 약 40일 동안 5천m가 넘는 고개를 10차례 넘었다. 그는 이 여행을 두고 “기네스감”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패스 4곳은 왕복까지 했어요. 한국인을 통틀어서도 이런 트레킹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3년 전에는 히말라야 돌포에서 무스탕으로 넘어가는 40일 트레킹을 했는데 이 여정 역시 길이 험난해 한국인으로 도전한 사람이 많지 않단다.

“앞으로도 히말라야, 티베트 오지 여행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에게 “왜 히말라야냐”고 하자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제3의 극지라고 불립니다. 지구의 자연을 대표하는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히말라야에 사는 눈표범을 보고 싶었어요. 지구에서 가장 보기 힘든 동물입니다. 식물 중에는 5천m 고지 눈 속에 피는 설연화가 있어요. 마른 꽃잎을 따서 차로 달여 마시면 오묘한 자연의 맛이 납니다.”

그는 중·고교 시절 축구부 주장을 하며 100m를 12, 13초대에 주파하기도 했던 운동 능력자이자 장서 5천권을 둔 ‘책벌레’이기도 하다. 요즘도 한겨레신문 책 기사를 참고해 매주 1~2권은 독파한단다.

먼저 ‘만년의 여행 열정’을 화제에 올렸다. “제가 부산고 졸업 문집에 제 삶의 철학으로 ‘매일 매일 후회하지 않는 삶이 인생에서 성공할지어다’라고 썼더군요. 사실 그때는 경제적 어려움에 장학금을 받고 계속 공부하려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어요. 고교 때의 생각이 지금껏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살 시간이 많지 않아요. 후회 없이 살아야죠.”

스스로 소우주인이라는 자각은 언제부터? “어릴 때 여름밤 마당 멍석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구도 태양계의 별이잖아요. 인간은 우주인이라는 생각을 일찍부터 한 거죠.”

그는 사람은 왜 모두 “별난 존재”인지도 말했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초신성 폭발 때 온 원소가 생명을 이루고 인간이 되었어요. 인간은 누구나 60조개 세포로 되었고, 각 세포핵 안 디엔에이(DNA)가 사람마다 다 달라 과학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이죠.”

1980년대 초 미국 체류 때 나사와 세계적인 지리학 잡지인 내셔널지오그래픽 본사를 드나들며 천문 자료도 훑었다는 그의 우주에 대한 열망은 20년 전 한국인 1호 우주인 도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위원이던 60살 박 변호사의 우주인 응모는 한겨레신문에 인터뷰가 나올 정도로 화제였다.

1980년대 정법회·민변 창립멤버
전민련·민중당 인권위원장 맡아
문익환 목사·신학철 화가 등 변론
예순에 우주인 모집 도전 계기로
마라톤 풀코스 100회 이상 완주
“사람은 다 별나게 사는 소우주인”

“사법개혁 핵심은 법조일원화”

“지덕체를 겸비한 대표 한국인을 선발한다는 우주인 광고 문안을 보고 바로 저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순진했죠.” 3만6천명이 도전장을 낸 이 공모 필기시험에서 그는 낙방했다.

왜 순진? “나중에 보니 우주 개발은 어느 나라나 국방과 관련되었더군요. 대부분 위성은 (군사 목적의) 정보를 얻기 위한 거죠. 한마디로 우주 항공은 전쟁놀음의 한 형태입니다. 우주인 선발은 세금을 국방예산으로 더 많이 쓰기 위한 홍보용이고요.”

그는 5공 말기인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고 이듬해 대선 때는 백기완 후보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았다. 그가 1986년 조영래·이상수 변호사 등과 함께 만든 인권변호사 단체 정법회(정의실천 법조인회)는 2년 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재탄생했다.

“6월 민주항쟁 때 국본 소속의 약 70명 변호사가 플래카드를 들고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어요.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당시 그의 거리 활약상 역시 말 그대로 ‘별난 소우주인’이라 할 만하다. “경찰이 쏜 지랄탄이 터지면 시위대가 다 도망가기 바쁘잖아요. 저는 악이 바쳐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어떤 때는 날아 온 최루탄을 손으로 집어 다시 경찰 쪽으로 던지기도 했죠.”

그는 지난해 1월 지금은 옥에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 관저 앞에서 ‘키세스 시위대’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무력한 공권력을 대신해 시민이 윤석열을 체포하자는 사회 단체의 호소에 호응해서다. 왜 관저로 갔느냐고 하자 그는 “군부독재 30년을 살아봐요”라고 받았다.

“박정희 유신 긴급조치 시절엔 얼마나 공포가 심한지 친구들이 모여서 이야기해도 담장 밖에서 누가 듣는 것 같아요. (박정희 정권은) 언제 잡혀 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국민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치를 했어요. 세계 독재 국가는 다 그럴 겁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오늘날 개명 천지에 서울법대 나온 윤석열 검찰과 김용현 같은 군대 깡패들이 야당의 입법독재나 탄핵으로 국정 운영을 못 하겠다고 계엄을 하다니 말이 됩니까. 권력이면 다 할 수 있다는 미치광이들이죠. 요즈음 세계를 상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트럼프는 훨씬 나쁜 미치광이고요.”

그가 사법시험에 붙고 바로 변호사가 된 것도 “사법살인을 저지른 독재자 박정희의 (검·판사) 임명장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단다.

그는 1989년 출범한 민주운동단체 결집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이듬해 창당한 진보정당 민중당의 인권위원장을 맡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임수경 평양세계학생축전 참가 사건, 민중화가 신학철의 모내기 그림 사건 등 주로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사건 인권 변론과 법률 자문을 했다.

기억에 남는 변론을 묻자 친구인 고 노무현 대통령이 1991년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 훼손 소송을 들었다. 당시 주간조선은 인권변호사인 노무현이 ‘호화 요트 소유주’라는 등의 보도를 했다가, ‘허위 과장 보도’라는 원고 주장을 받아들인 1심 재판부에 의해 2천만원 위자료 지급 판결을 받았다.

“제가 왜곡 보도를 한 조선일보를 혼내줘야 한다고 부추겨 노 전 대통령이 소를 제기했죠. 그때만 해도 정치인이 최고 언론 권력이던 조선일보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을 생각하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노 전 대통령이 죽은 것도 언론 권력 탓이 큽니다. 주간조선 보도가 그 출발이었죠.”

박용일 변호사. 김혜윤 기자

그가 한 변론 중에는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로 몰려 구속된 마광수 교수 필화 사건(1992년)도 있다. 1977년 미스코리아 진 김성희씨 ‘팬클럽’에서 알게 된 마 교수가 그에게 사건을 맡겼다고 한다. 그는 1988년 한 여성지의 ‘김성희-전경환 스캔들 의혹 보도’를 놓고 김씨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변호를 맡아 승소한 것을 계기로 ‘김성희 팬클럽’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

“마 교수가 김성희씨를 참 좋아했어요. 상당히 기대를 걸고 마 교수 사건을 맡았는데요. 법원에서 감정 증인으로 부른 제 고교·대학 친구인 안경환 당시 서울법대 교수가 너무 문학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패소로 이어졌죠.”

그는 1987년 헌법 개정 때 국본 헌법개정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동료 위원 고 김상철 변호사 등과 함께 헌법재판소 제도 도입을 제안해 뜻을 이룬 바 있다.

최근 사회적 화두인 사법 개혁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무엇보다 법조일원화와 법조인 윤리 교육이 중요하다”고 했다. 법조일원화는 변호사나 검사 등 일정 기간 법조 경력을 쌓은 사람 중에서 판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헌법재판소가 2014년에 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잖아요. 이번 윤석열 탄핵 때도 얼마나 사람들 애를 태웠습니까. 취지가 좋은 제도라도 인적 구성이 잘 못 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지금 헌법재판관을 보면 대부분 대법관으로 갈 이력의 정통 보수 엘리트들입니다. 여기서 엘리트는 딴 게 아니라 시험 성적이 좋고 권력 입맛에 따른 판결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시 붙고 판사가 된 뒤 노른자위 자리를 돌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으로 가는데요. 이들이 어떻게 서민들의 삶이나 일상을 알겠습니까? 무엇보다 이 시스템의 가장 큰 폐해는 전관예우입니다. 법복을 벗고 전관예우를 받으려 판결로 보험을 듭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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