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기성의 인문기행 ] 백제 중흥군주 무령왕 따라가기

박기성 전문기자 2026. 4. 2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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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십승지를 품고 있는 왕도의 고장 공주
공산성 회전교차로 앞의 백제 중흥군주 무령왕 동상_문서 두루마리를 들고 곤룡포 소매를 휘날리며 금강 건너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 뒤로 공산성 서문, 앞에 공산정이 보인다.

[<사람과 산>  박기성  전문기자]      왕은 공산성 서문 앞 로타리에 서있었다. 양(梁)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들고 곤룡포 소매를 휘날리며 금강 건너 북쪽을 가리키 고 있었다. "여러 번 고구려를 깨뜨리면서 다시 강국이 되었다(<삼국사기>)"는 백제 중흥군주 무령왕이었다. 

그가 '갱위강국(更爲强國)'을 호언한 것은 즉위 첫해(501년) 달솔 우영에게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을 습격케 하면서 북쪽 국경을 한강에서 임진강까지 밀어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듬해 말갈이 고목성(高木城)을 공격하니 군사 5천을 보내 격퇴시킨 바 있었다. 

경기, 강원(영서), 충청, 전라… 한반도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은 광개토왕이 즉위년(391 년)에 "남으로 백제를 쳐 석현(石峴) 등 10성을 뺏"으면서부터였다. 이로써 임진북예성남정맥 아래 임진강 북쪽의 경기도ー토산, 송악, 송림, 덕수, 장단, 임강, 마전, 교동, 강화, 하음을 잃었는데 장수왕이 재위 63년(475년) 또다시 쳐들어와 한강선까지 점령하니 백제는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기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석현은 토산 서쪽 임진북예성남정맥 위에 있다 <대동여지도>). 

무령왕은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할 때 죽임을 당한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 그 아들 삼근왕, 사촌동생 동성왕 다음 임금이었다. "신장이 8척이요 눈썹과 눈이 그림 같으며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저절로 귀부하는" 인물이었는데 지략 또한 뛰어났는바, 그의 한강 이북 수복 방략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든 독일군의 벨기에 우회 작전에 견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의 교통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1번국도와 3번국도가 간선 도로였다. 그런데 백제군은 이 좋은 길을 두고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다 지류인 조종천변의 심심산골 수곡성을 기습했다. 얼마 전 인근 군부대가 진지를 철거하면서 출입이 가능해진 현리산성으로 아래 골짜기 마을 이름이 물골, 한자로 수곡(水谷)이다. 다음 서파고개 넘어 운악천~명덕천~포천천~영평천~한탄강을 따라 진군, 연천군 청산면의 대전리산성(大田里山城), 옛날 고목성을 점령했던 것이다. 

대전리산성은 동쪽에 대전리, 동북쪽에는 궁평리(弓坪里)가 있다. 
이 궁평리는 <삼국사기> 지리지 권4에 나오는 "오곡군(五谷郡), 별칭은 궁화운홀(弓火云忽)"로 비정되는 곳이다(궁평=궁벌>궁불=궁화). 오곡은 고목성 싸움 27년 뒤인 성왕 7년 "고구려왕 흥안(안장왕)이 친히 병마를 거느리고 남침, 혈성(穴城)을 함락시키므로 좌평 연모에게 보기 3만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들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에 나오는 전곡(全谷=온곡<오곡)이며 혈성은 지리지의 공미달(功未達>고미달>구미달>굼달=穴城), 지금 연천이다. 

고목성까지 차지한 무령왕은 임진강을 따라 계속 서진(西進), 수비병도 별로 없었을 남안(南岸)의 성들ー아미성, 칠중성, 옥계토성, 이잔미성, 금파리성, 장산진, 오두산성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리고 아들 성왕으로 하여금 나제동맹을 굳건히 한 뒤 "신라·임나 2국병 등 대군(大軍)을 친히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 한성을 되찾고 더 진군하여 평양을 깨뜨림으로써 마침내 고토 6군을 수복(親率衆及新羅任那二國兵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也 遂復故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삼국사기>는 거 칠부 열전에서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리자 승세를 타고 거칠부 등 8장군이 죽령 이외 고현(高峴) 이내 10군을 취했다"고 나와있을 뿐이다. 여기서 6군은 송악, 송림, 덕수, 장단, 임강, 마전쯤이니 이때의 백제는 광개토왕 남침 이전의 영토를 거의 수복했다 할 것이다. 

이런 국가적 운명을 건 전쟁은 경제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 할 일이었다. 우리 인문기행팀은 그 개연성을 금강 북쪽의 의당면 수촌리 고분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안천 가에 끝이 없을 듯 펼쳐진 들판과 '십승지' 유구(維鳩)를 싸고돌며 물결치는 금북정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웅진으로 쫓겨 내려온 백제가 바로 이런 바탕이 있어 '갱위강국'이 될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2011년부터 5년 동안 발굴을 한 수촌리 고분군은 세형동검 등 청동기부터 후기신라에 이르는 시대의 1구역, 웅진 천도 직전 한 성백제 시대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환두대도, 금제 귀걸이, 중국제 자기 등이 나온 2구역으로 나뉜다. 2구역의 주인공들은 "중앙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지역 최고의 지배세력"이거나 중앙에서 파견한 22담로의 우두머리로 평가되고 있는바 같은 양식의 금동관모와 신발이 서산 부장리, 천안 공원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 규슈 구마모토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이들이 웅진 천도와 그 이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터다. 

글.사진 박기성   전문기자  l   사)한국山書會 회장이다. 서울大 문리대OB산악회장으로 〈사람과 산〉 편집장을 지냈다.  저서로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명산」, 「울릉도」가 있다. 
수촌리고분군 가는 길에 본 정안들과 정안천_웅진 천도 후의 백제가 '갱위강국'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들판의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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