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초점] “계약은 있는데 못 보낸다”…호르무즈 리스크, 지역 산업 덮쳤다

김명환 기자 2026. 4. 2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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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수출 급감 속 물류 차질 현실화…전통 제조업부터 흔들림 확산
걸프협력회의(GCC) 국가 중심 수출 40~60% 급감…UAE·카타르 등 물류 거점 직격
무역협회 대구경북지역본부 제공.

"요즘은 수출이 줄었다기보다 거래가 멈춘 느낌입니다." 대구염색산단에 입주한 한 섬유업체 대표의 말이다. 이미 생산을 마친 물량은 창고에 쌓여 있지만, 선적 일정이 계속 밀리면서 출하 시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계약은 유지되고 있지만, 납기 확정이 안 되니 매출로도 잡히지 않는다"며 "요즘은 주문보다 선박 스케줄을 먼저 확인한다"고 말했다.

성서산단의 한 자동차부품업체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이 업체 관계자는 "중동향 물량은 납기가 한 번 흔들리면 전체 일정이 틀어진다"며 "지금은 주문이 없는 게 아니라, 보내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이어 "거래처도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지연이 길어지면 신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부담이 크다"고 덧붙였다.

최근 수출 지표도 현장의 체감온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역협회 대구경북지역본부에 따르면 지난 3월 대구의 대중동 수출은 1천840만 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44.3% 줄었고, 경북 역시 1억1천710만 달러로 20.4% 감소했다. 현장에서는 이를 단순한 감소보다 기존 거래 흐름이 끊긴 결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짙다.

◆수출보다 먼저 흔들린 건 '길'

이번 수출 감소의 특징은 '수요'보다 '경로'에 있다. 중동 전체가 위축됐다기보다 호르무즈 해협과 연결된 물류거점에서 낙폭이 집중됐다. 3월 대구의 걸프협력회의(GCC) 수출은 전년 동월 약 1천400만 달러에서 490만 달러 수준으로 줄며 65.5% 감소했다. GCC는 사우디아라비아, UAE, 카타르 등 중동 핵심 산유국이자 주요 물류거점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경북도 같은 기간 5천600만 달러에서 3천400만 달러로 39.3% 줄었다. 반면, 비GCC 지역은 감소폭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국가별로 보면 감소 폭은 더 크게 벌어진다. 대구는 UAE 수출이 94.2% 줄었고, 카타르(-73.9%)와 쿠웨이트(-47.6%) 등 주요 물류거점에서 일제히 감소했다. 경북 역시 사우디아라비아(-52.0%), 카타르(-99.6%), 쿠웨이트(-88.7%) 등에서 낙폭이 컸다.

현장에서는 물류 불안정성을 가장 큰 부담으로 꼽고 있다. 지역의 한 수출기업 관계자는 "선박 일정이 계속 흔들리다 보니 납기 자체를 장담하기 어렵다"며 "운임과 보험료까지 올라 사실상 보내는 것 자체가 리스크가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수출을 이어갈지, 잠시 멈출지를 고민하는 기업이 많다"고 전했다.
무역협회 대구경북지역본부 제공.

◆물류에서 산업 전반으로 충격…섬유·철강 직격탄

물류에서 시작된 충격은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중동 의존도가 높은 전통제조업에서 변화가 먼저 나타나고 있다.

대구에서는 섬유와 자동차 관련 품목의 감소가 두드러졌다. 같은 기간 폴리에스터직물은 305만 달러로 54.6% 줄었고, 자동차부품은 192만 달러로 56.4% 감소했다. 승용차는 97.1% 급감하며 사실상 거래가 멈춘 수준이다. 폴리에스터단섬유직물(-79.0%), 폴리에스터사(-63.1%) 등 섬유 전반에서도 감소세가 이어졌다.

경북 역시 철강과 기계 중심 산업이 동시에 흔들렸다. 아연도강판은 283만 달러로 80.8% 급감했고, 중후판은 704만 달러로 47.0% 감소했다. 축전지는 68.0% 줄었고, 알루미늄조가공품도 20% 넘게 감소했다.

포항의 한 철강업체 관계자는 "중동 프로젝트 물량은 규모가 커 일정이 한 번만 밀려도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며 "지금은 생산과 출하 계획을 보수적으로 가져가고, 신규 계약도 신중하게 접근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박병복 대구상공회의소 조사홍보팀장은 "섬유는 공정이 길게 이어지는 구조라서 한 단계만 막혀도 전체 생산에 영향을 준다"며 "최근에는 납기 지연이 이어지면서 생산을 줄일 재고를 안고 갈지 고민하는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납기 지연이 반복되면서 계약 일정이 재조정되거나, 일부 물량이 보류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특히 중소 협력업체의 경우 재고 부담이 커지는 데다, 자금 회수시점이 늦어질 수 있어 현금 흐름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돌아갈 자리 없다"…중동 리스크, 장기 침체 우려 확산

더 큰 문제는 중동 상황이 진정된 이후다. 현장과 수출업계에서는 단기간에 상황이 안정되더라도 수출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 이후 중동 바이어들이 한국 대신, 튀르키예와 유럽 등 대체 공급선을 찾기 시작한 점이 부담이다. 한 번 바뀐 거래선은 쉽게 되돌리기 어렵다. 한 수출업체 관계자는 "거래처를 다시 확보하려면 가격이나 조건을 더 내줘야 한다"며 "그 자체가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용 부담도 커지고 있다. 운임과 보험료 상승이 이어지는 데다, 고환율과 고유가까지 겹치면서 채산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지금은 수출을 해도 남는 게 없는 구조에 가깝다"는 말도 나온다.

섬유와 철강 등 범용제품 시장에서는 중국과 동남아 기업들의 점유율 확대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물류 차질로 국내 기업들이 주춤하는 사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제품들이 시장을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는 것이다.

권오영 한국무역협회 대구경북지역본부장은 "이번 사태는 특정지역 의존도가 높은 수출 구조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며 "단기적으로는 물류 대응이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시장 다변화와 고부가가치 품목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전쟁 종료를 기다리기보다 산업구조 자체를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명환 기자 km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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