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신양 "그림 왜 그리냐고? 그리지 않으면 안되니까!" [설지연의 독설(讀說)]
5월 초까지 세종 미술관에서 전시
신간 '감정의 발견'에 담긴 그의 예술론
상상과 현실을 가르는
'제4의 벽' 에서 이어지는 질문들

"왜 연기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나요?"
박신양을 향한 이 질문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그가 처음 붓을 들었을 때도, 전시를 열었을 때도, 방송에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어김없이 같은 질문을 건넸다. 그는 매번 질문과 마주하면서도 한 번에 답을 끝내지 않는다. 그에겐 '왜 표현하는가'라는 훨씬 근본적인 물음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박신양의 세 번째 저서 <감정의 발견>은 그 질문에 대한 긴 호흡의 답변이다. 이 책은 지난달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신양의 전시쑈: 제4의 벽'과 발맞춰 나왔다. 그가 10여 년에 걸쳐 그림을 그리며 써 내려간 메모들과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쌓아온 기록들이 한 권으로 묶였다. 전시가 시각적 체험이라면, 책은 그 체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그의 전시는 회화에 연극적 구조를 결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로 살아온 30여 년 동안 천착해 온 '제4의 벽'(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모호하고 근본적인 경계)이 그림과 공간이라는 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작가가 단독 전시를 여는 경우가 흔치는 않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측에서 살아 있는 한국 작가가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전시를 진행한 사례가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저한테는 많은 분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에서 작업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점, 그림과 전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점, 그리고 이곳에서 연극적 형식의 전시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느껴지네요."
▶ 5월 10일까지 열리는 전시의 제목은 '박신양의 전시쑈: 제4의 벽'입니다. '쑈'라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전시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의도라고 하셨는데, 관객 반응은 어떤가요?
"아트 토크 자리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났다. 동시에 춤추고 싶었다'고 말씀해 주신 관객이 특히 기억에 남네요. 그 말을 듣고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잘 전해졌다고 느꼈습니다.
관객들께서 매우 진지하게 반응해 주시고, 예상하지 못했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저는 연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미술에서도 가능한 한 쉽고 친절한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주눅 들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전시에 대해 늘 고민해 왔어요. 설령 배우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관심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미술로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 전시를 계기로 인터뷰와 방송,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에 출연하셨던데요. 그때마다 "왜 연기를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반복해서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신간 <감정의 발견>에서는 이에 대해 비교적 긴 답을 내놓으셨습니다.

"아마 많은 분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미술이나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이 쉽지 않다 보니,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네요.
저는 이 질문이 단순히 작업의 계기를 묻는 차원을 넘어, 왜 표현을 하느냐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번 답하고 끝낼 수 있는 질문이라기보다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는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한동안은 제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스스로 설명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 작품 판매를 미루기도 했죠. 다만 설명하는 일이 정작 그림을 그릴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도 느꼈습니다. 책을 쓰거나 전시를 하는 일 역시 결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말과 글로 그림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논리로 정리되기보다 감각에 가까운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따라올 것 같고, 그에 대한 답도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작가로 작업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네요."
▶ 이번 책은 어떤 집필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 궁금합니다. 첫 책 <제4의 벽>은 일기처럼 기록한 글을 묶어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평소 이런 글들은 어떻게 기록하시나요?
"<제4의 벽>은 지난 1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일기처럼 기록해 온 메모들을 모아 출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 내용을 모두 담지는 못했어요. 이후 2023년 첫 전시를 계기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새롭게 정리된 생각들이 생겼고, 세종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작업과 전시에 대한 고민을 계속 글로 남기게 됐습니다. 이번 <감정의 발견>은 그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된 책이죠.
책은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는 화가가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 2부는 당나귀 연작에 대한 이야기, 3부는 감정과 표현에 대한 생각, 4부는 '제4의 벽'이라는 개념이 현재의 전시 형식으로 이어지게 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죠."
▶ 책에서 언어로 표현하는 일에 대한 중압감과 어려움도 언급하셨습니다.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거침없는 언변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고, 그로 인해 오해받은 경험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글이 말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시나요?
"글과 말 모두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한계가 있다고 느낍니다. 다만 그 한계를 들여다보는 과정 자체가 지금 제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많은 분과 미술,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예술에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필요하긴 하지만 결국 중심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과 글은 그림을 계속 그리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는 정도면 충분하겠죠."

▶이번 책은 전시와 맞물려 출간된 만큼, 전시 도록이자 가이드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전시에서 직접 그림 그리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 것도 '배우가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보다 친절하게 답하기 위한 시도라고 쓰셨던데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방식을 시도해 왔죠. 2년 전 평택 전시에서는 작업 과정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여 '연극적 전시'라는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직접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왜 그리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전시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결국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더 나아가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작업과 전시를 먼저 스스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고민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제4의 벽’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게 됐죠."
▶ 전시의 핵심 개념으로 말씀하신 '제4의 벽'은 박신양 씨 작업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제4의 벽'은 원래 연극에서 사용하는 개념이지만, 저는 그것을 현실과 상상, 삶과 죽음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어 생각하는 여러 경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결국 각자는 자기 경험과 감각을 통해 그 기준을 만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제4의 벽’은 그런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배우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무대 위에서 이 개념을 경험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더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평택 전시와 세종 전시 역시 모두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있는가'라는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제4의 벽’은 연극에서 무대 위의 약속을 뜻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현재 연기를 쉬고 계시다 보니 배우 은퇴로 받아들이는 시선도 있지만, 오히려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오랜 배우 생활이 현재의 그림 작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시나요?
"배우로 살아온 시간은 제 그림 작업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배우로서 무엇에 집중해 왔는지를 오래 돌아보게 됐죠.
특히 '제4의 벽'은 배우에게 연기의 출발점이자 기준이 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로 산다는 것은 결국 상상을 현실처럼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무대 건너편에는 언제나 관객의 시선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그 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저는 그 관계를 연기자의 입장이 아니라 작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왜 상상하고, 왜 이야기의 방식으로 그것을 보고자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그때 생겨난 질문들은 지금도 제 그림 속에서 계속 발현되고 있는 거죠."
▶ 책에서도 계속 묻고 계신 '무대 위 환상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사람들은 허구임을 알면서도 왜 극에 몰입하는가',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을 찾으셨나요?
"우리는 늘 무엇을 현실로 보고 무엇을 상상으로 볼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분 기준을 스스로 확인하는 태도야말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실존의 근거라고 봅니다. 연극에서는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그 경계를 비교적 분명하게 볼 수 있고, 저는 그 원리가 삶에도 이어질 수 있다고 봤어요.
무대 위 환상은 우리가 허구의 이야기에 몰입하려는 본능에서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로 들어가는지는 각자 다르며, 저는 그 기준을 ‘감각’이라고 보고 있어요. 사람들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극에 몰입하는 이유도 결국 상상을 감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 역시 마찬가지로 각자의 감각 속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 당나귀를 자주 그리신 이유를 스스로를 당나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짐'을 지고 있다고 느끼시는지, 그리고 그것을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표현하신 의미가 궁금합니다.
"저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은 단순히 한 번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고민과 선택을 함께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제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쉬운 기준에서 설명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방식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느끼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하는지에 더 집중해 왔습니다.
저에게 예술은 결국 나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계속 묻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왜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하며,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질문은 누구에게나 해당하지만, 특히 예술가에게는 하나의 책임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가 짊어지는 '짐'을 이야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 물감의 독성으로 쓰러진 적이 있고, 갑상샘 문제로 오랜 기간 제대로 서 있기 어려웠던 시기에도 작업을 이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연기도, 그림도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고 쓰셨던데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제가 관객일 때 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흐에게 기대하는 것도 결국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보고 싶어 합니다.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런 기대와 시선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전제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 <감정의 발견>이라는 책 제목처럼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감정은 단순한 감상주의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이며 이성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학생들에게 감정이 무엇인지 자주 묻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짜증이나 화 같은 감정만 떠올리거든요. 저는 감정이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몰입'도 감정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늘 감정 속에서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저는 감정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전시와 그림도 그런 점을 함께 이야기하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죠.”

▶ "왜 그림을 판매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일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는 그림의 판매를 보류해 왔습니다. 제 작업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작품에 대해 직접 설명해야 하는 부담도 커졌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는 제 그림이 저를 대신해 말할 수 있는 방식을 더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합니다.
미술과 예술에 대해 모든 것을 제가 직접 설명하기보다, 제 작업을 적절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파트너를 신중하게 찾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평소 독서도 즐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생 책'이 있습니까.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꼽고 싶습니다. 한국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같은 인물 관계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있고, <티베트 사자의 서>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구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를 배울 때 영화화된다면 꼭 지나가는 사람으로라도 출연하고 싶은 한국 소설 세 편이 있었는데, 그게 <태백산맥>,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죽음의 한 연구>였어요. 제가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태백산맥>,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영화화됐죠.
친구가 마침 <죽음의 한 연구>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게 제 첫 영화 '유리'예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죠."



'설지연의 독설(讀說)'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나눠보는 연재 코너입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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