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 반대해달라" 박정희 부탁 받은 차지철...진짜 반대론자 된 사연

박정희외 김대중<16>
1965년 2월 9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파월장병 국민환송대회’가 열렸다. 전년 9월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140명(장교 34명, 사병 96명, 태권도 교관 10명)의 1차 파병에 이어 5개월 만의 2차 파병으로 2,000명 규모의 비전투 건설지원단 ‘비둘기 부대’를 베트남으로 떠나보내는 파병 환송식이었다. 이날 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여야 지도부, 주한유엔군사령부 고위 간부, 3만여 명의 시민과 가족, 학생들이 참석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 장병들에게 건투와 무운 장구를 기원하는 환송사를 했다.
"여러분을 떠나보내는 우리 국민은 여러분의 노고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더욱 분발해서 경제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자유의 십자군인 여러분의 장도에 반드시 하느님의 가호가 있을 것이며 영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투와 무운장구를 기원합니다."

이날 환송식에서는 야당(민주당) 소속 4선 의원인 라용균 국회부의장도 환송사를 해 모처럼 국가 차원의 해외 파병에 초당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정희 집권 초기 한일국교정상화와 함께 국가적 현안이었던 베트남 파병
박정희 집권 초기 베트남 파병 문제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국가 차원의 중대 현안이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경제 발전과 국방력 강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해 일본과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그래서 일본과는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당시 미국의 큰 관심사였던 베트남 파병을 타진했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 5개월 후인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거쳐 미국을 방문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뤄졌다. 박정희는 먼저 도쿄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만나 국교 정상화 문제를 논의했다. 이어 워싱턴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베트남전이 심화하면 전투부대를 파병할 수 있다”며 베트남 파병의 자락을 깔아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않은 상태여서 논의는 더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베트남 상황이 악화하자 미국은 베트남 전쟁 참전을 서두르게 되었다. 1964년 5월 세계 자유우방국가 25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서한을 보낸 것은 그 일환이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동외과병원 파견을 요청받았다(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회고록,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박정희는 군정 시절부터 미국의 파병 요청에 대비해 군사 사절단을 베트남에 보내 사전 조사를 하도록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반공주의 기치 아래 베트남 파병을 미국에 제안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은 확전과 주한미군 가족들의 반발 등을 우려해 거절했지만, 이때의 베트남 파병 추진은 박정희 정부 파병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파병 원칙적으로 찬성...방법론에선 박정희와 달랐던 김대중
김대중은 한일 국교정상화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파병 문제도 원칙적으로 찬성하되 방법론에서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베트남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 ‘용병’이라고 비판한 윤보선 중심의 야당 강경파와 재야 및 학생 세력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물론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명분으로 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병은 여야가 초당적으로 지지했고, 정부가 요청한 파병동의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1964년 말 비전투 공병부대 등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 파병 동의안은 차후에 전투병 파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고 반대 의견도 상당했다. 또 이즈음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면서 우리 정부가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김성은 당시 국방부장관은 ‘미국이 한국군 파병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주한미군 감축을 거론하지 말라’는 내용의 서신을 주한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냈다. 미국정부는 곧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주한미군을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한(공적인 편지)을 보내왔고, 주한미군 철수론은 잠잠해졌다(김성은 회고록).
김대중과 야당은 "정규군 대신 의용군 보내자" 제안
김대중이 속한 민주당(대표 박순천)은 전투병 파병까지 염두에 두고 현역 정규군 대신 전역한 예비군 가운데 지원자를 모집해 의용군을 보내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원래 의용군 파견 방안은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여러 경로를 통해 베트남 파병 관련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방보좌관 양달승의 연구 보고서에서 제기되었다. 이 보고서는 당시 국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던 비동맹회의가 파병에 반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한국이 파병을 강행한다면 한국의 유엔 가입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한미동맹 차원에서 파병한다면 의용군을 보내고, 반대급부로 미국의 경제원조 액수를 구체적으로 보장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민중당(1965년 민주당 민정당이 통합해 창당)의 의용군 파병 대안은 이 보고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박정희도 당초 이 보고서를 김성은 국방부장관에게 보여주면서 “이 보고서대로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김 장관은 즉각 반대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이 4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는데 정규군 대신 의용군이나 보내면서 반대급부를 생각한다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의용군은 민간인 신분으로 국제법상 포로 대우 문제, 군법 적용, 보상금(전사자, 전투수당) 지급 문제 등도 있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의용군이 아니라 정규군 파병으로 방향을 잡고 추진해 나갔다(김성은 회고록).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으로 공식화된 베트남 파병
전투부대 중심의 3차 파병은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강경 야당과 재야 및 학생 시위가 격화되던 때인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에 공식화했다. 다음은 박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1, 2차에 걸친 정상회담 요지이다.
박정희-존슨 정상회담 요지
1. 박 대통령은 한국군 1개 사단 증파에 동의했다. 이는 순수한 자유 우방을 돕는다는 뜻으로 미국은 주한미군 5만 5,000명 감축을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며, 현 수준을 유지한다.
2. 확고한 한국 방위를 위해 예비사단 3개 사단에 전투 사단과 같은 수준으로 무기와 장비를 지원한다.
3. 군원이관은 월남 파병기간 중 중단한다(재원은 한국군 처우개선에 사용한다).
4. 북괴의 국내 파괴, 전복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간첩 장비를 대폭 지원한다(구축함, 쾌속정, 레이더 등)
5. 개발차관 자금으로 1억 5,000만 달러를 계상한다. (출처=김성은 회고록)
이 같은 정상회담 결과로 주한미군 감축 문제, 국군 장비 현대화, 미국 측의 군사원조 및 경제개발 원조 자금 유지 등 그동안 박정희 정부가 원했던 것을 거의 모두 얻어낸 셈이었다. 군원이관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던 군사원조(물자, 비용)를 줄이고 한국 내에서 조달 가능한 품목(유류, 피복)을 한국 정부가 직접 조달하도록 하는 것으로, 당시 예산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정부로서는 매우 큰 부담이었다.

김성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해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에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때를 기다려왔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개인적으로는 이 정상회담 결과로 미국 조야가 그에게 가지고 있던 사상적 의구심을 완전히 불식시킨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회에서는 전투부대 파견을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이 벌어졌다. 야당 강경파는 물론이고 그동안 파병에 원칙적 찬성 입장이었던 김대중 의원도 전투부대 파병에는 강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김대중은 훗날 회고록에서 전투부대 파병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고, 전황이 밝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희생만 따르고 실익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김대중, 회고록1).
공화당에서도 박정희 심복이었던 차지철이 거세게 반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나왔다. 정구영 당 의장이 소극적이었고, 박정희의 심복 중의 한 사람인 차지철 초선 의원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파병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청와대로 불러 파병 반대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차 의원이 파병 반대론을 주도하면서 베트남 역사 연구에 깊이 빠져들어 진심으로 파병 불가를 주장하고 나서는 바람에 그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노재현, ‘청와대비서실’, 중앙일보사).

야당의 반대가 거셌지만 정작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은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파동 속에 싱겁게 국회 동의 절차를 마쳤다. 8월 11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이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등원을 거부했다. 그 바람에 이틀 후인 8월 13일 여당과 무소속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1만 5,000명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이에 따라 청룡부대(해병 2여단, 1965년 9월 29일과 10월 3일), 맹호부대(육군 수도기계화사단, 10월 14~16일)가 베트남으로 떠났다.
결국 이뤄진 파병...박정희는 미국에 경제적 보상 요구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6년 1월과 2월 미국 험프리 부통령이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방한, 4차 파병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베트남 전황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국회는 물론이고 국민 여론도 회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추가 파병을 거절하면 주한미군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전 배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제기됐다.
박정희도 이전 파병 때 자제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다. 2차경제개발5개년 계획 실시에 필요한 자금 수요를 염두에 두고서였다.

미국의 추가 파병 요청이 절실했던 만큼 한국의 요구 수준이 대폭 높아졌다. 기존 파병 대미 교섭에서 미비했던 점을 보완하고, 한국군 현대화와 경제개발 차관 대폭 확대,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인 건설기업 및 민간인 기술자 고용, 용역 기회 확대 등 14개 항목의 합의서가 작성되었다. 미국 측 협상 주역이었던 윈스럽 브라운 주한미국대사 이름을 딴 ‘브라운 각서’였다.
이중 특히 주목할 것은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인 건설기업 및 민간인 기술자 고용 용역 기회 확대를 규정한 제 11항이었다. 이에 따라 건설 및 용역회사의 베트남 진출이 크게 확대되었다. 현대건설, 대림산업, 효성, 쌍용, 대우, 동아건설, 신동아, 삼환기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 축적한 해외사업 경험은 베트남전 종전 후 중동 특수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추가 파병에 따른 미국의 대규모 지원 약속을 배경으로 박정희 정부는 국회에 4차 추가 파병 동의안 처리를 요청했다. 그러나 야당뿐 아니라 차지철 의원 등 공화당 의원들의 날선 질문 공세로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공화당 소속 차지철 의원은 “또 다른 파병 요구가 있을지 확신이 없고 월남전의 앞날은 계속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런 전장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 흘리게 할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이런 역풍을 뚫고 4차파병 동의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백마부대(육군 제9사단) 1개 사단과 수도사단 1개 연대(3차 파병 때 해병대연대인 청룡부대 포함으로 제외됐던 맹호부대 26연대, 혜산진부대라고 불림) 파병이 이뤄졌다.
정규군 파병 반대했지만 베트남 방문해 장병 위문한 김대중
김대중은 정규군 파병에는 반대했지만 국가의 이름으로 파병한 이상 우리 젊은이들이 주둔하고 있는 현장을 찾아가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66년 9월 박순천 대표, 고흥문, 김상현 의원 등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하고 파월 장병들을 위문했다. 김대중은 회고록에서 채명신 파월 사령관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반겼으며 미군 현지 사령관도 고마워했다고 술회했다. 회고록에는 당시 미군 사령관이 했다는 얘기도 실려있다. “한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다. 파병을 그토록 반대했던 야당이 일단 파병이 결정되자 위문을 왔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는가. 진심으로 존경한다.”(김대중 회고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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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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