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없는 하루’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떤 커피로 하시겠어요? 산미 있는 커피? 고소한 커피?”
“산미 있는 커피요. 감사합니다.”
“드시면서 화면에 보이는 큐알코드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접속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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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공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 시작 전, 류소연 배우가 관객들에게 내려준 따뜻한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사진: 전솔비) |
공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를 보러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커피 드실래요?” 이 커피 한 잔이 공연 표 값에 포함된 것인지, 혹은 배우와 관객 간에 오가는 선물인 것인지 궁금해하며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든다. 나는 객석의 맨 왼쪽 끝 열, 앞에서 두 번째 줄 의자에 앉는다. 극장 안에는 카페 브금이 흘러나오고 있고 무대 한복판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커피 내리는 도구들이 놓여있다. 주위를 둘러보자, 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하나 둘 커피를 마시면서 오픈채팅방에 접속하는 모습이 보인다.
공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음료와 휴대폰은 자제해야 하는 극장의 기본적인 규칙이 깨지자, 이렇게 모여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은 느슨해진 극장의 공기가 퍼져나간다. 이 다정한 극장은 분명 바깥 세계를 향해 반쯤 문을 열어두고 있다. 무대 위에서 바리스타 복장을 한 채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저 사람이 이 공연을 이끌어갈 사람일 것이다. 그의 앞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종이 뭉치가 눈에 띈다. 아마 대본일 것으로 추측했고, 예상대로 그는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 종이 뭉치를 꺼내 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누군가는 배우가 어떻게 대사를 외우지 않고 공연을 하냐고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겠다. 공연 소개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공연은 1인 다큐멘터리 퍼포먼스라고 소개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퍼포먼스, 혹은 다큐멘터리 연극은 실제 자료와 현실을 기반으로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는 공연예술이다. 배우와 관객, 무대와 현실 사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하고 그래서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극 중 자신의 역할에 이입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무대 바깥에서 살아온 배우 자신의 삶이 무대 안으로 끊김 없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류소연이라는 배우는 현실을 끌어온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공연에서 소개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일하는 노동자이자, 30대 후반의 청년이며, 여성이자, 책방을 운영한 적 있고, 공연 이외에도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하는 예술가이다.
이 공연에서 그는 바리스타 복장으로 커피를 내리며 카페에서 일하던 모습을 미처 다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 공연의 순서를 다 외우지 않은 채로 슬쩍슬쩍 대본을 보며 마치 연습이 다 끝나지 않은 배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완전한 노동자도 완전한 예술가도 아닌 채로, 아니 불완전하기에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복합적인 모습 그대로 그가 말문을 연다.
노동자이자 예술가의 정체성으로 그가 ‘말’의 문을 연다.
제가 만든 커피 드실래요? 그리고 제가 만든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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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 의거한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 관리 매뉴얼 만들기〉 공연 포스터. 류소연 작가의 1인 다큐멘터리 퍼포먼스(2026)로, 지난 4월 9일~19일 진행된 ‘2026 안전연극제: 면역력’ 상연 작이다. |
정말로 이상한 것, 누구에게는 당연한 것- 근무 시간 내내 서 있기
“내가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일하면서 만난 노동자들에게, 일하다 앉을 수 없는 환경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비자본주의 산업을 지탱하는 서비스 노동의 현실은 ‘안전’의 질문에서 누락되곤 한다. 노동이 유발하는 통증은 안전과 무관한가? 서비스 노동에서 통증은 참고 감내해야 할 개인의 정신력과 숙련의 문제인가? 하지정맥류는 산업재해의 질병 목록에서 비껴가는가? 산업안전보건법을 뒤져보며 나는 의자의 비치에 관한 규칙을 찾아냈다.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 이 한 줄의 규칙을 보며 나는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편지 한 통을 나는 동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공연 소개 글-
무대 위에서 예술가 류소연은 노동자 류소연으로서 그간 자신이 겪어온 여러 임금노동 경험을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은 최저시급도 받지 못했거나,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거나, 나이가 많아지면서 일을 구하기 어려워 난처했거나, 그래서 불합리한 조건에 대해 말하기 어려웠던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최근 자신이 일하던 어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업무 강도가 놀랄 정도로 세서 도저히 버틸 수 없어 3일 만에 그만둔 일화를 고백한다. 카페에서 일한 경험도 많고 바리스타 경험이 꽤 쌓인 그가 ‘3일 만에’ 일을 그만둘 정도로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그곳에서 그는 업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앉을 시간도 없었고 앉을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에게는 ‘근무 시간 내내 서 있는 일’이 당연한 일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대형 브랜드 카페의 근무 환경이 그러했다. 의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 일하는 동안 계속 서서 다리의 통증을 참아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노동 환경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냐고’ 그는 묻는다.
제9장 제80조에 명시된 ‘의자의 비치에 관한 규칙’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9장 제80조에는 분명히 의자의 비치에 관한 지침이 명시되어 있다. 배우는 관객들에게 의자에 관한 규칙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하지만, 처벌 규정이나 강제성이 없기에 줄곧 무시되는, 있으나마나 한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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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9장 휴게시설 등을 정리한 제80조에는 ‘의자의 비치’에 관한 조항이 적혀있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노동 환경을 보호하는 관련 법령에는 ‘의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의 노동 환경에는 ‘의자’라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모순에 쓴 웃음을 지으며 배우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공연을 시작하며 접속했던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다 같이 서비스직 근로자의 안전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배우는 ‘근로자’에 지움 표시를 하고 ‘노동자’로 다시 쓴다.)
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규칙을 가만히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구체적인 매뉴얼을 만들어보자는 이 제안은 공연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한 통의 편지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공연의 어느 지점에서 류소연 배우는 전태일 열사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썼던 편지를 읽는다.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전태일의 편지 중에서)
존재하지만 지켜지지 않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길, 현실에 맞게 개선하길 요구했던 그 편지는 여전히 지금도 소리 내 읽을 가치가 있다. 여전히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남아 있고, 법에 적혀있는 ‘앉을 권리’가 노동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의자가 있어야 할 곳에 의자가 없기에, 전태일의 편지는 아직도 빛 바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
관객들과 함께 만드는 안전 관리 매뉴얼
채팅방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을 읽을 수 있었다. 형태적으로는 등받이가 있는 편안한 소파 같은 의자, 혹은 앉아서 일과 휴식을 모두 다 할 수 있는 높은 의자를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건을 고려할 때 누군가는 의자가 손님과 분리된 공간에 있으면 좋겠고, 혹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나도 떠오르는 생각을 적었다. 일단 직원 수만큼의 의자가, 그리고 자기 의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떠올렸다.
그 순간, 왜인지 공지영 작가의 책 『의자놀이』가 떠올랐다. 쉼의 공간조차 경쟁이 되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최소한으로만 보장되는 쉼의 자리 말고, 너와 내가 앉고도 조금 더 자리가 넉넉하게 지켜지는 여유가 필요하다. 남는 의자에 잠시 다리를 올릴 수도 있는 그런 영역까지 상상할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살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의자’라는 말은 어딘가 귀엽지 않은가. 기억 속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교실에는 늘 모두에게 자기만의 의자가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만든 안전 관리 매뉴얼이 지켜지려면, ‘안전’을 말하는 방식을 국가나 대기업의 입에서 나오는 투자나 효율성의 가치 중심으로부터 이탈시켜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기에 카페 업주, 혹은 고용주는 노동자가 시간 대비 더 많은 노동을 하게 하려고 효율적인 동선을 짠다.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데 의자가 있으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에 놓지 않는 것이다.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는 노동 환경에서 의자는 안전하지 않은 물건이 된다. 빠르게 움직이다가 의자에 걸려 신체 일부가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등 다칠 수 있다. ‘다치지 않고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의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효율적으로 일해야 하는’ 기업가치의 안전을 위해 의자를 놓을 수 없다는 목소리와 충돌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편, 오늘날 점차 늘어나고 있는 로봇 카페는 의자 없이도 ‘안전하게’ 커피를 만들고 효율성을 만들어내는 노동력을 등장시키고 있다. 로봇 카페에서 로봇은 정확히 필요한 움직임만 수행하며 최적의 동선으로 커피를 주문 받고 생산한다. 공연에서 류소연 배우는 자신이 직접 로봇 카페에서 촬영한 커피 만드는 로봇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면 로봇은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고 내내 서서 일하지만, 인간처럼 하지정맥류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다. 의자가 필요 없는 로봇 노동의 효율성에 맞춰진 기준에 따라, 앞으로 인간은 더 많은 노동을 포기하거나 혹은 노동의 자리를 얻기 위해 통증을 참아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로봇을 경쟁하게 하며 안전이나 건강, 보호의 권리를 개인이 포기하게 하는 사회가 과연 괜찮을지,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지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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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을 끝내며 류소연 배우는 민중가요 〈세상에 지지 말아요〉(지민주)를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사진: 전솔비) |
커피 한 잔 뒤에 남겨진 긴 이야기- 관객 혹은 손님 혹은 시민의 자리에서
안전연극제는 2014년부터 세월호 연극제를 지속해 온 혜화동 1번지 동인들이 이어가고 있는 기획이다. 2024년의 주제가 ‘계속-계속-계속 말하기’였다면, 2025년에는 ‘불완전’이었고, 올해의 주제는 ‘면역력’이다. 2026 안전연극제는 ‘면역력’이라는 단어를 통해 ‘안전’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다시 쓴다. 사고가 난 후에 포착하는 ‘안전’이 아니라, ‘안전’을 다양한 감각 속에서 점검하여 예견된 참사를 막자고. 제도에 존재하지만 지켜지고 있지 않은 ‘앉을 권리’. 앉지 못하는 통증을 작은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자고 제안하는 좋은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이 공연에서 류소연 배우는 자신이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3일밖에 일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이 연극을 만들었다고 조금은 겸연쩍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형 브랜드 카페에서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동자들과 자신을 비교한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경험과 관계를 쌓지 않은 소재로 예술 작업을 했다는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가? 3일밖에 일하지 않은 그가 만든 이 연극은 앞으로 얼마간은 내가 어떤 카페에 가든 카페 노동자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그에게 앉을 의자가 있는지 유심히 보게 해줄 것이다. 가끔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만들어 주셔도 된다고, 말 한마디라도 건넬지 모른다.
이 흥미로운 공연은 나에게 단지 선한 시민의식에 관한 교육적 효과보다는, 현실이 무대로 끊김 없이 이어진 장소에서 언젠가 상상 또한 현실로 끊김 없이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감각적 깨달음을 남긴다. 그건 아마 배우 류소연이 예술가이자 노동자로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네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서비스직 노동자의 모습이 조금 묻은 채로 커피를 내려주고, 공연 시간 내내 앉지 않고,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한결같이 열정적인 배우의 모습으로 다정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커피를 마신 관객들은 현실을 향해 열린 극장 안에 앉아, 마치 어떤 서비스를 제공받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공연을 본 경험이 어떤 의미일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가 건네준 커피 한 잔은 따뜻하고 맛있었지만, 커피 한 잔 뒤에 남겨진 긴 이야기는 쉽게 일상으로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 소개] 전솔비.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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