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 오른 ‘올레길 대모’ 발자취를 따라… 치유의 오름·위안의 바다 ‘놀멍 쉬멍 걸으멍’[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전임기자 2026. 4. 2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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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일기자의 여행 - 창시자 서명숙 추모하며 걷는 제주올레 1코스
2007년 9월 올레길 처음 시작
2012년 27개 코스 437㎞ 완공
제주여행 이미지 완전히 뒤바꿔
동생 잃고 상심 컸던 서 이사장
1코스 걸으며 위로받은 사연도
말미오름이 최고의 하이라이트
해발 126m서 본 바다색 ‘장관’
반대편서 오르면 해변 코앞에
종달리엔 카페·빵집 옹기종기
제주 풍경 즐기는 선물세트코스
제주 올레길 1코스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알오름 정상을 한 여행자가 걷고 있다. 탁 트인 하늘과 다양한 채도의 제주 바다, 그리고 밭담을 두른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이다. 멀리 야트막한 산처럼 보이는 곳이 제주 올레길 마지막 21코스가 지나는 오름 지미봉이다.

제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올레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 교문 앞. 제주 올레길 1코스의 출발지점에 섰다. 2007년 9월 올레길이 처음 시작한 자리다. 여기서 시작한 올레길이 제주 섬을 한 바퀴 돌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종점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렸다. 2012년 11월 완성된 제주 올레길은 27개 코스, 437㎞다. 올레길 지도 앞에서 숫자를 헤아리다 새삼 깨달은 사실 하나. 아, 19년 전에는 올레길이 없었구나…. 올레길이 없었을 때 우린 제주를 어떻게 여행했을까.

제주의 해안과 한라산 중산간, 난대림의 숲길과 흐려진 마을 돌담길을 이어서 만든 올레길은 그동안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먼저 그 길은 ‘걷는다’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걷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훌륭한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멀미 나는 속도로 살아온 도시 사람들이 그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제주의 아름다운 경관만은 아니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이들은 길 위에서 위안과 치유를 만났다.

가끔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길 위에서였다. 무릇 여행이라면 그곳 사람들과 따스하게 교유해야 한다는 것도, 길 위에서 물 한 병을 사면서 배웠다. 여행하는 방법부터 삶의 방식까지. 올레길이 우리에게 축복처럼 선사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이제는 ‘올레길 없는 제주’는 상상할 수 없다. 바다 없는 제주나 한라산 없는 제주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이 지나가고 그 뒤를 다른 사람이 지나면서 또렷해진 자취. 그것이 바로 길이다. 길은 사람이 흘러가는 자취이기도 하고, 땅과 사람이 함께 흘러가는 모양이기도 하다. 길은 통로로, 순환으로, 방향으로도 읽힌다. 길은 때로 이성이나 도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모든 의미를 통틀어 ‘올레길의 시작’이었던 사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지난 7일 타계했다. 그가 생전에 놓은 올레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통로이자 순환이고 방향이었다. 그의 삶도 그랬다. 길은 자주 따뜻한 위로였지만, 때로는 ‘잘살고 있냐’는 아픈 질문이기도 했다. 그가 제주에 맨 처음 놓았던 그 길을 다시 걷는다.

제주 올레길 1코스 말미오름 가는 길. 이 코스의 거의 유일한 오르막길이다.

# 서명숙을 보내고 그 길을 걷다

2021년 1월. 서 이사장은 제주 1코스를 혼자 걸었다. 그날은 세상을 떠난 남동생 서동철의 1주기 기일이었다. 서 이사장에게는 동생이 둘 있다. 서동철은 두 살 터울의 ‘조폭’ 출신 동생이다. 늘 말썽을 일으키던 동생은 골칫거리이기도 했지만, 그는 올레길을 놓는 누나 서명숙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제주를 손금보듯 알고 있어 올레길 탐사대장을 맡았다.

서 이사장이 서울에서 30여 년을 발버둥 치며 살다가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리는 번아웃 상태로 산티아고 길을 걷고 고향 제주로 돌아와 걷는 길을 내기로 했을 때 서동철은 모든 걸 다 바쳐서 누나를 도왔다.

그런 동생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서 이사장은 한동안 동생을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과 함께 길을 낼 때의 추억이 수시로 떠올라 올레길을 더 걷지 않을 정도였다. 훗날 그 시절을 술회하며 그는 “슬픔이 통증이 되더라”고 했다. 올레길을 걷지 않는 대신, 한동안 한라산 둘레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동생의 1주기를 맞아 서 이사장은 다시 올레길 1코스에 섰다.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계마저 닫힌 시기였다. 그때 올레길 1코스를 걸으며 서 이사장이 얻었던 건 ‘깊은 위로’였다. 자신이 놓은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듯, 서 이사장도 그 길에서 위안과 치유를 경험했다. 서 이사장이 동생을 보내고 걸으며 위로받았던 그 길을, 이제 서 이사장을 보내고 나서 다시 걷는다.

종달리 바다 너머로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해안 길에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 갯무꽃 만발한 봄날의 올레길

제주 올레길 1코스의 시작은 시흥초다. ‘시흥(始興)’의 ‘시(始)’가 시작을 의미하니 올레길의 시작과 끝이 마을 이름에 담겨 있는 셈이다. 서 이사장이 이곳을 제주 올레길의 시작으로 삼았던 건 코스의 경관이 훌륭해서이기도 했지만, 제주 향토사에 밝았던 동생 동철의 제안도 한몫했다. 육지에서 제주 목사(牧使)가 처음 부임해오면 제주 섬을 한 바퀴 도는 탐라 순력에 나섰는데 그 시작이 여기 시흥리였다는 것. 애초에 고려했던 성산 일출봉 대신 시흥리가 제주 올레길의 시작점이 된 사연이다.

시흥초에서 시작한 올레길은 호젓한 밭담을 끼고 이어진다. 초등학교 주변의 들녘은 온통 검은색이었는데, 올레길 리본 표식을 따라 들어갈수록 흙은 붉은색을 띤다. 밭에는 현무암 토양과 화산쇄설암이 부서져 만들어진 붉은 흙이 뒤섞여 있다. 월동 무도 끝나고, 당근도 끝난 뒤라 밭은 비어 있다. 심은 씨앗이 자라서 감사의 수확이 됐고, 비워진 땅에 다시 씨앗을 심기 직전의 짧은 빈 시간이다. 비워둔 빈 밭에 다음 파종을 위해 밀어놓은 붉은 땅이 그려낸 문양이 무슨 근사한 미술 같았다.

빈 밭의 돌담 아래에는 지금 분홍색 갯무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갯무꽃 말고도 봄날의 올레길 길섶은 온통 꽃밭이다. 양지꽃, 현호색, 고들빼기꽃, 대극꽃, 각시붓꽃 ….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탱자꽃도 피었고, 쪼그리고 앉으면 쌀 한 톨 크기의 별꽃도 가득하다. 꽃뿐만 아니다. 새들은 또 어디서 이렇게 날아들었을까. 각양각색의 경쾌한 새소리가 줄곧 걸음을 따라온다. 어디 1코스만 그럴까. 요즘 같은 봄날에는 올레길의 어떤 코스를 걷더라도 이런 호사를 넘치도록 누릴 수 있다.

올레길 1코스가 지나는 종달리의 구멍가게 승희상회. 한때 아이들이 북적대던 ‘학교 앞 문방구’였다.

#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의 바다

올레길 1코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오름이다. 먼저 오르는 건 말미오름이다. 말 머리처럼 생긴 오름을 두산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 오르면 해발 126m에 불과한 야트막한 높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장쾌하다. 가운데 바다를 놓고 양쪽으로 우도와 일출봉이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다가온다.

인상적인 건 말미오름에서 보는 바다의 색깔이다. 저마다 다른 채도로 층층이 색감이 구분된다. 제주 올레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감의 바다로 꼽는 세 곳이 있다. 남원리 큰엉해안에서 보는 쪽빛 바다. 그리고 외돌개 해안에 펼쳐지는 청자 빛 바다. 마지막으로 여기 시흥리와 종달리 해안의 옥색 바다다. 그중 최고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시흥리와 종달리의 옥색 바다다. 그 바다의 색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말미오름이다.

말미오름이야말로 서 이사장이 제주올레길을 처음 세상에 꺼내놓으며 들고나온 ‘회심의 카드’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몰라봤을 곳이었다. 카드는 통했다. 말미오름 하나로 올레길은 그 길을 걸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서 이사장은 처음 말미오름에 올랐을 때의 감동을 자주 얘기했다. 평생 서귀포에서 나고 자라 어지간한 풍경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 그도, 말미오름에서 보는 그림같은 경관은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이었다. 훗날 서 이사장은 그때를 술회하며 “처음 보고서 동철이와 나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하물며 제주에 여행으로 며칠 가본 게 고작인 육지 사람들이라면 더 할 말이 있을까. 누구든 그냥 말미오름 위에 데려다 놓으면 ‘와’ 하는 탄성부터 지르게 된다.

# 올레길이, 끊긴 두 마을을 잇다

말미오름에서 살짝 내려서면 알오름이다.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긴 하지만, 말미오름과 알오름은 사실 하나의 오름이다. 시흥리에서 오르는 오름 동쪽 언덕을 말미오름이라고 부른다면, 종달리에서 오르는 오름 남쪽 언덕을 알오름이라 부른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은 지척에 있지만, 거기서 보이는 경관은 사뭇 다르다. 보통 올레길을 걸으면 말미오름에서의 절경을 먼저 보고 나서 알오름을 나중에 보니 좀 심드렁할 수 있겠다 싶은데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전혀 다른 스케일과 서로 다른 거리(距離)로 두 오름에서 보는 풍경의 느낌이 다르다.

말미오름에서는 시선이 바다를 향한다. 한쪽 방향이다. 등 뒤에 솔숲이 있어서 그렇다. 반면 알오름 정상은 초지라 사방으로 트여 있다. 남쪽으로 우도와 성산 일출봉의 바다 풍경이 펼쳐지고, 등 뒤로 돌아보면 오름의 연봉들이 첩첩이 겹쳐진다. 발밑으로는 초록의 밭을 두르고 있는 마을까지 펼쳐진다. 바다와 산과 마을이 다 보인다는 얘기. 말미오름에서의 경관이 극장식이라면, 알오름의 경관은 입체적이다.

알오름이 말미오름과 또 다른 건 바다와의 거리다. 지도를 보면 알오름이 바다와 ‘아주 조금’ 더 가까운데, 시각적으로 느끼는 바다와의 거리는 훨씬 더 가깝다. 말미오름에서는 ‘먼바다’로 느껴지던 것이 알오름에서는 ‘눈앞의 바다’로 보인다. 꼭 누가 마술을 부리는 듯하다.

지척에 있지만 말미오름이 있는 시흥리 마을과 알오름이 있는 종달리 마을은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다’는 표현보다는 ‘나쁘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제주에서 같은 해안을 끼고 있는 이웃 마을은, 대개 사이가 좋지 않다. 바다의 경계가 없던 시절, 같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들 사이에서 시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된 물질을 하던 드센 해녀들끼리 시작한 싸움이 마을 싸움으로 번지는 건 다반사였다.

이런 두 마을을 올레길이 하나의 길로 이어붙였다. 말미오름과 알오름 사이를 막고 있던 소 목장의 문을 열어 올레길 1코스를 완성했던 것. 올레길이 사이가 나쁜 두 마을의 끊긴 길을 다시 잇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길이 아니고서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바다는 안 보여요 카페’. 제주에 카페를 냈다 하면 다들 ‘바다가 보이냐’고 물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단다.

# 종달리의 승희상회에서 만난 기억

제주 올레길 1코스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길이다. 호젓한 돌담길을 걷다가 오름을 오르고 다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을을 지나면 한쪽 어깨를 바다에 적시며 타박타박 걷는 길도 있다. 제주의 거의 모든 것을 길 하나에서 경험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주 올레길 중에서 딱 한 코스만 걸어야 한다면, 단연 1코스다.

알오름에서 내려와 한참 농로를 걷다가 해안도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종달리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종달리는 올레길이 놓인 뒤에 가장 근사하게 변모한 마을이다. 마을 시골집을 손봐서 들여놓은 근사한 카페와 세련된 식당, 작은 빵집, 기념품 등을 파는 소품 가게 등이 올레길이 지나가는 골목에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토박이 마을 노인들의 가게와 빈집을 찾아 들어온 젊은 이주자들의 가게가 자연스럽게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다.

이곳에 ‘바다는 안 보여요 카페’가 있다. 카페 앞에 그 이름을 지은 연유를 적은 작은 간판을 세웠다. “제주도에 카페를 차렸다고 말하면 모두 똑같이 물어본다. ‘바다 보여?’” 똑같은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를 생각해보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마을 안쪽의 카페에서는 상호처럼 바다가 안 보이지만 파란 바다색 테두리를 두른 마을 안의 고요한 카페는 나름의 매력이 있다.

바다는 안 보여요 카페 옆에는 소품과 과일잼, 노지 감귤 등을 두루 파는 ‘잼있는집’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승희상회’가 있다. 승희상회를 지키고 있던 김영숙(79) 씨는 가게에 자주 들렀던 서 이사장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세상을 떠나기 서너 달쯤 전이었으니 1월쯤이었을 것이었다. 혼자 온 서 이사장이 승희상회에 들러 삼다수 가격을 물었다. 500원. “물값이 편의점보다 싸다”며 웃었다고 했다.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돈 받지 않고 삼다수를 들려 보냈다고 했다.

서 이사장을 떠올리던 김 씨가 한숨처럼 말했다. “아이고, 게메양(그러게 말이에요). 한창 젊은 나이에 무사 경(왜 그렇게) 되었을꼬. 할 일이 하영(많이) 남은 나이인디….”

제주 호국영웅 강승우 중위 기념비. 동생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이 기념비 앞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 죽음에 대한 위로와 추모하는 자리

종달리를 지나면 길은 종달∼시흥 해안도로로 이어진다. 제주올레 화살표와 리본을 길잡이 삼아 길을 걷는 동안, 종달리의 옥색 바다는 마치 ‘말 없는 동행’처럼 줄곧 왼쪽 어깨 쪽으로 따라온다. 목화휴게소를 지나서 송난포구 못미처 길옆에 추모비가 있다. ‘호국영웅 강승우 추모비’다. 강승우 중위는 6·25전쟁 때 백마고지 전투에서 산화한 제주의 전설적인 호국 영웅이다. 성산읍 시흥리 출신인 강 중위는 박격포탄과 수류탄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의 진지로 뛰어들어 난공불락의 기관총 진지 3개를 모두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올레길을 걷는 이들도 다들 무심히 지나치곤 하는 기념비였지만, 동생을 보내고 이 길을 걷던 서 이사장은 처음으로 추모비를 읽고 거기 적힌 강 중위의 나이를 자세히 보았다고 했다.

1930년 출생. 1951년 12월 육군 소위 임관.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 나이 만 스물두 살이었다. 전사한 그에게 훈장이 주어졌지만, 아들을 졸지에 떠나보낸 고향 마을의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서 이사장은 한 지역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그때의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내 동생은 그래도 환갑을 병상에서 맞이하고 눈을 감았으니 청년 강승우에 견주면 참으로 오래 살았구나. 나는 그 길 위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뜻하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서 이사장의 유해는 한라산 국립공원 아래 서귀포시 상효동의 남국선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남국선원은 수행 기간 내내 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하는 무문관 선원과 안거가 있는 제방 선원을 두고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남국선원을 찾아간 날은 종일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서 이사장이 안치된 비에 젖은 납골 벽에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쉿, 여왕님 깨실라.’ 생전에 서 이사장은 시각과 청각에 예민했다. 특히 소음을 잘 참지 못해서 식당이나 가게에 들어가면 습관처럼 ‘TV를 꺼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묘비명은 오래전에 가까운 몇몇이 의기투합한 자리에서 스스로 농담처럼 꺼냈던 얘기였다. 지인들이 그때의 이야기를 기억해서 묘비에 새겼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향초 옆에다 조용히 꽃다발을 얹었다. 지금 그는 고요한 곳에서 푹 쉬고 있을까.

■ 종달리 ‘승희상회’

제주 구좌읍 종달리 ‘승희상회’의 ‘승희’란 상호는 짐작하다시피 가게 주인 김영숙(79) 씨의 딸 이름이다. 딸의 나이가 올해 65세다. 가게 개업은 50년쯤 됐다는데, 김 씨는 개업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은 과자를 주로 팔지만 본래 종달초 주변의 유일한 문구점이었다. 동네 주민들과 간간이 찾아오는 올레꾼이 손님의 전부다. 하루 매출은 적은 날은 2만∼3만 원, 많은 날도 5만∼6만 원이 고작이란다.그래도 김 씨는 남편과 함께 매일 오전 7시쯤 가게 문을 열어 오후 9시에 닫는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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