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는 죽음의 구호 ·시민 삶 무관한 ‘국가적’이란 말···백무산 인터뷰[전문]
시인 ‘백무산’의 뉴스 사이트 검색 결과 절반가량은 시 ‘정지의 힘’ 중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는 시구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에 올랐다는 내용의 기사다. 시에서 뽑아낸 강렬하고 압축적인 이 아포리즘에 대한 대중의 호응은 백무산의 너르고 깊은 작가정신과 시적 실천을 가린다.
열한 번째 시집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창비) 출간을 두고 지난해 12월 20일 울산에서 그를 만났다. 백무산은 여전히 노동하고, 공부하며 죽거나 사그라지고, 버려진 ‘소수자들’에 시선을 두며 살아가는 시인이었다.
이날 지금도 이어지는 조선소의 산재와 죽음의 기원부터 친자본의 노동운동, 진영에 빠진 문인들 문제 등을 두고 3시간 인터뷰를 했다. 이후 두 차례 더 E메일로 보완 인터뷰를 했다. 다음은 인터뷰 목차와 일문일답.
①내 시 지면은 문예지가 아니라 불법유인물이었다 ②발동기에서 본 초월적인 힘 ③사람이 죽건 말건 개의치 않던 야만의 구호 ‘하면 된다’ ④‘지옥선’에서 아무도 죽은 자들의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⑤쇠파이프 들고 현장 순시하던 조선소 총괄 책임자 ⑥비용 절감-과중한 피로-대형사고는 ‘자본의 살인’ ⑦문학은 소수자의 억압된 목소리를 대변해야 ⑧부자되기 위한 노동운동은 자본의 협력적 공범이 될 뿐 ⑨거대 양당체제가 시민 비판정신까지 제한 ⑩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보수를 이롭게 한다고 취급 ⑪‘국가적’이라는 것들은 대체로 시민의 삶과는 무관 ⑫효율과 속도의 기계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유목 정신 회복해야

- 선생님 기사 검색하면 시 ‘정지의 힘’ 중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에 오른 게 가장 많이 나오더군요. 이 시가 많이 유명해졌는데요.
“시집을 내면 가까운 사람이나 독자들에게 서명해서 증정하는 게 보통 문화잖아요. 그걸 못해요. 시집을 내고 나서 다시 읽어본 적도 거의 없었을 겁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매번 독자들과도 만나고 주변 사람들과 소통도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시집 내는 그 순간부터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지난 시절의 대한 정리는 끝이 났고 마음에는 이미 딴 살림을 차린 거지요.”
-이유는요.
“스스로 만족스럽지가 않다는 게 첫째죠. 내 감정을 드러낸 부분에 민망함 같은 것들도 많이 있고요.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해서 그런 건데 그건 혼자서 시를 써 왔기 때문일 겁니다. 문학에 대한 자의식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문학 관련 직업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문학 전공을 한 적도 없죠. 문학 강의도 들어본 적도 거의 없어요. 작가들의 글과 행동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제발 시인이라고 소개하지 말라고 당부하죠. 우리들 주변에는 시인이라면 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시 쓰는 일은 내세울 일이 전혀 아닌 것 같아서요.”
-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은 없었는지요? 영향을 끼친 작가나, 선생은 없는지요.
“이상하게도 학교 다닐 때 문학에 열정적인 선생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문예반 같은 데 별 관심 없었고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작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땐 읽을 팩이 많지 않았지만 도스토옙스키나 헤르만 헤세 책들은 다 좋아했죠. 특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고등학교 1학년인 나를 완전히 압도했죠. 간혹 시집들 사서 읽고 문예지들은 드물게 보긴 했지만 시골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10대에는 한국 소설들을 거의 읽지 않았어요. 중학교 3학년에서 고1 방학 때 세계 단편 문학 전집 20권을 동시에 읽었는데, 읽고 나니 스토리가 짬뽕이 되어 막 엉켜 있더라고요. 문학의 매력에 빠져 살기도 했지만 그때도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그 시기 작가들의 삶이 유약하고 퇴폐적으로 많이 인식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무렵에 과학책을 접하면서 과학만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백무산이 시를 처음 쓴 건 1983년이다. 2003년 이산하와 인터뷰(문화일보 9월 22일 보도)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83년에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중전기로 옮겼습니다. 아는 분 소개로 해방신학 관련 성경공부를 했고 개척교회를 만드는 데 참여했습니다. 민중교회였어요. 현대중전기에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목회는 산업선교회 활동을 했던 전도사가 했는데,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후배라면서 내게 소개시켜 주었어요. 그가 박영근 시인입니다. 그 시인이 주보에 실린 내 시를 보고 다른 시들을 보내달라고 했죠. 그 무렵 창간한 오월시 동인 무크지에 실린 건데 다른 등단 절차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그것으로 내 의사와 관계없이 등단한 거죠.”
①내 시 지면은 문예지가 아니라 불법유인물이었다
- 그때 어떤 내용의 시를 쓰셨는지요.
“조선소 노동 경험을 담은 시였습니다. ‘지옥선’ 연작인데 10편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분노가 많이 노출된 시였어요, 그 무렵 가까운 친구가 공장에서 죽었고, 테러리스트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그후 지역에서 사회단체도 만들어지고 유인물을 만들 때 참여하고 시를 싣기도 했죠. 그래서 초기 내 시의 지면은 문예지가 아니라 불법유인물이었습니다.”
- 당시 필명은 무엇인지요? 백무산의 무산은 무산자(無産者)에서 따온 거라고 여러 기록에 나오는데요.
“1980년대 중반에 본명을 쓸 수 없었죠. 다른 필명 몇 개 쓰기도 했어요. ‘무산’도 꼭 그걸 고집한 게 아니라, 첫 번째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1988) 원고를 달라고 했을 때 그 이름으로 한 게 굳어진 거죠. 자꾸 의미를 물어오는데 조금 거북하기도 해요. 무산자라는 게 노동자라는 의미니까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산(山)을 워낙 좋아해서 그 이미지도 맞고요. 간혹 한문으로 이름 써 달라고 하면 한문은 없다고 하죠.”
- 이산하와의 인터뷰에서 푸코, 데리다, 가타리, 네그리, 들뢰즈 등 철학책을 재미있게 읽는다고도 하셨는데, 요즘도 계속 읽으시는지요.
“저는 책을 가려서 읽는 사람이 아니라서 아무 책이나 다 읽습니다. 책을 읽다가 이해를 못 할 때 자존심이 상하니까 파고들긴 하죠. 어쨌든 그걸 통과해 보고 싶어서 끝까지 읽죠. 그런데 내게 쓸모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는 체 할 곳도 없고, 어디 가서 강의할 일도 아니고. 이해하는 수준까지 읽다 말기도 하죠. 필요 때문에 읽은 게 아니고 내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읽은 건데, 읽다 보면 언제나 문제의식이 더 커져 버리고 그래서 다른 책으로 옮겨가게 되곤 했어요. 시간이 없어서 늘 아쉬웠습니다. 요즘은 인류학책들 읽는 재미에 빠졌죠. 한동안은 레비스트로스에게 빠져 있었죠. 가까운 곳에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데 선사시대 유적과 관련지어 읽으면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재미도 있죠. 그건 또 문학과 가장 인접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내 생각에 동의하는 작가는 없었습니다.”
②발동기에서 본 초월적인 힘
- 1980년대 초 울산 현대중공업과 현대중전기에 다닐 때는 첨단 장비를 직접 다룬 경험이 많다는 일화도 있는데, 기술이나 과학 쪽은 언제부터 관심을 두셨는지요.
“어릴 때는 그림 그리는 걸 많이 좋아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흥미가 떨어지고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더라고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동기 수리하는 가게 앞을 지나다가 발동기 시동 거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우리가 몸을 움직이면 움직이는 만큼만 힘이 가해질 뿐이었는데, 이건 한 번 시동을 걸어놓으니 계속 힘이 생기는 거죠.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계속 남았어요. 모두가 너무 힘겨운 노동을 하던 시기였잖아요? 이것이 신세계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떤 초월적인 힘을 종교가 아니라 발동기에서 본 것 같았습니다. 과학책을 문학책만큼 읽었을 겁니다. 90년대에 양자역학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 같은데 흥미롭게 따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혼자 그렇게 읽은 수준이야 뻔한 수준이지만, 과학사의 흐름을 꾸준히 이해해온 것은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나름으로 해석하는 힘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현대중전기로 가기 전엔 현대조선소에서 일하셨는데, 언제 입사하신 건지요.
“1974년에 현대조선소에 들어갔죠. 그땐 ‘㈜ 현대조선소’였어요. 스물서너 살 때부터 한 시스템의 책임 기사였어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1970년대 중후반 울산공단을 만든 사람이 20대, 30대예요. 간부들도 30대부터 40대 초반이었어요. 모두 거짓말이라고 해요. 그만큼 산업생산 분야 경험이 일천하고 경력자가 없었어요. 그 시기 내가 만진 모든 기계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입되는 기계였어요. 나이 든 사람들보다 우리가 수용이 빨랐죠. 그 무렵에 공대 출신자들은 거의 맹탕 수준이었는데, 그들이 입사하면 우리가 처음부터 그들을 교육시켰어요. 현장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농사를 짓다 온 사람들이었는데, 일이 주 동안 훈련시켜서 마구잡이로 현장에 투입하니까 사고가 엄청나게 자주 났어요. 농업노동과 산업노동은 완전히 다른 노동인데, 간부들은 그런 인식도 없었어요. 신체가 산업노동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했죠. 사실 근대화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산업노동과 노동의 시간에 적응시키는 과정이었죠.”
- 열악한 상황에서 대형 선박을 어떻게 만든 건가요.
“내가 고교 시절에 GDP가 100불에서 300불 정도였단 말입니다. 자전거도 1970년대 중반까지 완제품을 못 만들었어요. 일본에서 베어링 같은 주요 부품을 수입해서 만들던 땝니다. 방직공장이나 경공업 분야 그리고 봉제, 가발공장이 거의 전부였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첨단 산업이었던 대형 조선소를 건설했단 말이에요. 사실 너무 황당한 얘기예요.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그 고속도로 건설 팀들이 와서 100만 평 부지에 조선소를 만들고 배를 건조하기 시작한 거죠. 서른 중반의 이명박이가 건설 부문의 소장이었어요. 토목 공사밖에 한 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더구나 이명박은 상고, 상대를 나와 현대건설에서 한 5년 정도 일했는데 도대체 뭘 알았겠어요? 그 건설 팀 가운데 기계를 다룬 사람들이 배를 건조하는 일을 관리했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들의 무모한 시행착오에 노동자들이 큰 피해를 보았죠. 결과적으로 이룬 것만 가지고 신화다 뭐다 떠들죠. ‘하면 된다’는 말은 그 시절 우리가 일하던 조선소에서 나온 말이 분명합니다. 조선소는 사실 정주영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정주영에게 떠맡긴 거죠. 국가가 주도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사람이 죽건 말건 조금도 개의치 않았어요. 어차피 국가에서 다 막아주고 책임져 주었으니까요.”
③사람이 죽건 말건 개의치 않던 야만의 구호 ‘하면 된다’
-경부고속도로 지을 때도 많은 노동자가 사망했는데요.
“추풍령 휴게소 언덕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다가 죽은 노동자 위령탑이 있어요. 공사 도중 사망한 77명의 인부를 추모하는 의미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추려고 애썼을 텐데 그 정도 희생은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의미로 공개한 거죠. 생명에 대한 감각이 다르죠. 불과 2년여 기간에 그 숫자만 해도 엄청 많은 건데 얼마나 축소해서 말했겠어요.”

- 2024년에만 조선소에서 20명이 산재로 죽었고, 2025년에도 울산, 거제에선 매일 1명 이상 산재 사고가 난다는 통계도 나왔는데요.
“울산 공단이 생기고 2023년까지 산재 사망자는 3000명(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추정)이 넘습니다. 재해를 당해 다친 사람은 20만 명에 가깝습니다. 이건 통계에 잡힌 수치일 뿐입니다. 공단 전체 통계지만 가장 많은 사고가 조선소에서 일어났죠. 실제 피해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언론의 입을 막고 행정에서 묵인하도록 한 것은 국가였어요. 아주 야만적인 구호가 ‘하면 된다’입니다. 저들이야 뒤에서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지만 앞에서는 낭떠러지인데 밀어붙이면 떨어져 죽는 거죠.”
- 일 강도는 어땠는지요.
“한번은 작업자가 부족해서 지원 요청을 했더니 41살 먹은 사람을 보내줬어요. 제가 가서 항의를 했죠. 영감을 보내주면 어떡하냐고. 우리 조원들이 그분에게 늘 ‘영감은 그늘에 가서 쉬어’라고 했어요. 여름에는 탱크 속이 영상 60도가 넘어요. 하루에 작업복 전체가 땀에 젖고 말리기를 반복했죠. 오후 되면 어깨와 등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이 허옇게 달라붙어 있었어요.”
- 일하다 다치신 적은 없는지요.
“현장에서 부상을 여러 번 당했어요. 현대중공업 있을 때는 3층 높이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열흘을 누워서 지냈는데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산재라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어요. ‘공상처리’라고 해서 회사에서 ‘병원비 좀 주마’ 하는 수준에서 무마하고 말았던 시절이었거든요. 사망한 경우에도 부조금 걷듯이 동료들이 모아서 위로금 한 200만, 300만원 주는 거로 끝냈어요. 제가 처음 입사할 때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인사부장이 질문 있으면 하라고 그러길래 누가 물었어요. ‘위험한 사업장이 많아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죽습니까?’라고요. 인사부장이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죽는 사람보다 사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라고 했어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농담인 거요. 그때 정말 노동자가 많이 죽었어요. 직원이 3만5000명이 넘었는데 회사 부근에 변변한 병원 하나도 없었습니다.”
-회사 안에 의무실도 없었나요.
“의무실이 하나 있었는데, 정식 의사가 아니라 인턴 한 명 간호사 한 명이 있었어요.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쇠에 걸려서 손을 다쳐서 갔는데, (인턴이) 의무실 캐비닛을 막 뒤지더니 ‘어, 없네’ 하는 거예요. 마취제가 없다는 거요. ‘그냥 꿰맵시다. 마취하는 것보다 더 빨리 새살이 돋아’ 하더니 뼈까지 드러난 생살에 아홉 바늘을 꿰맸어요. 100만 평이나 되는 방대한 사업장에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다른 사업장에서는 아무도 몰랐어요. 소문만 흉흉할 뿐이에요. 이틀에 3명은 죽었을 거라고 얘기했을 정도거든요. 죽진 않았어도 사고가 그만큼 많이 났던 거죠. 병원이 없으니까 뼈가 부러지고, 살이 다 드러나고 내장이 터진 환자를 트럭에다 싣고 1시간이나 걸리는 시내 병원에 싣고 가요. 도착하면, 의사가 내려와서 트럭 적재함에 실린 환자를 살펴보고 숨이 붙어 있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내기도 했어요.”
④‘지옥선’에서 아무도 죽은 자들의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백무산은 첫 번째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실천문학사, 1988)를 내기 4년 전인 1984년 무크지 <민중시·1>(청사)에 ‘지옥선’ 연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작 아홉 편 중 여섯 편이 조선소 산재 사망 사건을 다룬 것이다. “비켜 비키란 말야!/ 죽는 꼴 첨 봐! 일들 하러 가지 못해!/ 앰불란스 달려가고 /뒤따라 걸레조각에 감은 /펄쩍펄쩍 튀는 팔 한 짝 주워 들고 / 싸이렌소리 따라 뛰어가고”(지옥선·2) “떨어져 죽은 인부들의 빛바랜 초상화가 빗속에 흐느꼈다/ 간밤에 나와 함께 짜장면을 나눠먹었는데/ 짜장면처럼 까맣게 타서 거적에 쌓여 가는 친구의 얼굴이/ 어두운 날들, 질척이는 바닥에 핏물 되어 흘렀다”(지옥선·5) “어지럽다 쓰린 뱃속 지상 100m/ 밧줄 하나에 건 목숨들/ 해가 바뀌고 동짓달이 오기 전까지 /족히 50명이 넘게 이곳에서 죽었다지만/ 아무도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지옥선·7) 같은 시어로 고발했다.
- 지금은 당시 ‘성공의 신화’가 ‘죽음의 현실’을 덮어버린 듯합니다. 박정희 신화, 정주영 신화, 이명박 신화 같은 게 생겨났는데요. 정주영 회장이 1960년대 후반 조선소 지을 돈을 꾸러 영국에 가서 유력자에게 거북선이 든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는 이미 1500년 전에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했다는 일화도 지금까지 회자하는데요.
“다 거짓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26만t 짜리 선박을 수주하는데 16세기 수십t짜리 목선 만든 게 실적이라면, 내세울 게 그것뿐이라면, 그게 오히려 더 약점이 되면 되었지 무슨 도움이 되었다는 건지, 다 지어낸 이야기지요. 일제 강점기 부산에 미쓰비시가 조성한 조선소가 있었고, 1950년 국영기업으로 지정된 대한조선공사에서 수천t급 배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걸 두고 뭔 수십 t짜리 목선 자랑했더니 그게 먹혔다고요?”
- 정주영 회장을 만난 적이나 일화는 없는지요.
“제가 통신 기술 자격증도 있어서 무선통신 업무도 본 적이 있는데, 매일 밤 전통문을 받아서 회장실이나 사장실에게 보고하는 일이었죠. 그럴 때 그들이 하는 짓을 봐서 알죠. 정주영 회장실에 보고하러 간 적이 몇 번 있어요. TV에도 몇 번 나오더라고요. 새벽 5시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한다고요. 강철 체력이라고 그러거든요. 그건 내가 알아요. 새벽 5시에 출근하긴 해요. 이사들이나 간부들도 그 시각에 나와야 되잖아요. 그때 이사 상무들이 정주영 워커발에 쪼인트 안 까인 사람이 없었을 거요. 머리 길다고 그 자리에서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도 했죠. 간부들 새벽에 일을 시켜놓고는 자기는 회장실 침대에 들어가 늘어지게 잠을 자요. 자고 나니 팔팔하잖아요. 그러고는 밤까지 설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질리는 거죠. 기를 죽이죠. 그 당시 사장은 초빙 사장이었고 부사장이 실제 대표였는데, 그에게 거의 매일 보고를 하러 갔어요, 한 번은 비서가 없어서 부사장에게 바로 보고서 파일을 줬죠. 그걸 보더니 얼굴이 험악해지더니 파일을 구겨서는 내 얼굴에 던지고 욕을 퍼붓는 거요. 나는 도대체 이유를 모르는 거죠. 비서가 달려와서 나를 데려가더니 하는 말이, 모두 한글로 다시 써오라는 거요. 설계도면부터 모든 매뉴얼과 스펙과 작업 용어들이 다 영문이라 영어로 쓸 수밖에 없는 건데, 이걸 한글 발음으로 다 고쳐 써오라는 거요. 이 사람이 경부고속도로 닦을 때 덤프트럭을 몰았고 정주영의 눈에 들어 매제가 된 사람이었어요. 대단한 인물인 건 틀림없죠. 나중에 현대중공업 회장까지 했으니까요. 조선 기술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총괄 책임자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냥 사람 족치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어요. 야간에 긴 쇠파이프를 들고 다니며 현장을 순시하면서 공포를 조성하기도 했죠.”
⑤쇠파이프 들고 현장 순시하던 조선소 총괄 책임자
- 현대중공업에서 어떤 일을 주로 해 왔는지요?
“스물서너 살부터 현장 책임기사였어요. 선박 운행과 관련된 전반적인 컨트롤 시스템 장치를 설치하고 성능 검사를 받고 인도하는 일까지 했습니다. 배를 몰고 바다에 나가 마지막 안전과 성능 검사까지 마치고 선주에게 인계하는 일이었어요. 한 척에 당시에도 천억 원이 넘는 것이라 긴장도가 매우 높아 피를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루만 인계가 늦어도 수천만 원의 크레임을 물어야 했으니까요. 스물다섯 살에 한진해운 2만5000 t짜리 화물선 12척을 맡았었는데 명명식 날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에게 제가 브리핑을 했습니다. 30여명의 고위직 인사들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회장이 내게 이유도 없이 욕을 퍼붓고 갑질을 한 일이 있었어요. 그 당시 현장 일이라는 게 늘 그런 일이라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그 자리에 그의 며느리와 어린 손자 손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40여 년 후에 소위 대한항공 땅콩회향 사건과 가족 갑질의 당사자였어요.”
- 요즘 노조(운동)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제 노동조합 활동은 운동이라기보다 제도화된 활동입니다. 정치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오히려 정치 활동이 약화되었어요. 조합은 어차피 이익단체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조합의 힘만으로는 자본의 힘을 이겨낼 수 없죠. 노동자는 계급의식이 없으면 자본의 일부일 뿐입니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위상을 높여가는 운동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성장하지 못한 거죠.”
- 이재명 정부 산재 정책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재명 정부에서 일하러 갔다가 죽어 오는 사람이 없도록 국정의 앞선 순위로 챙기겠다고 했어요. 그런 말을 한 대통령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 의지는 읽을 수 있죠. 하지만 노동자 출신 노동부 장관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과가 없었어요.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얼마 전 통계에는 산재 사망 사고가 더 늘어났어요. ‘산업 경찰’을 투여할 만큼 신경을 썼는데도 늘어났거든요. 누적된 구조적 문제죠. 비용 절감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비용을 줄이려고 사람을 줄이면 노동의 강도가 높아가고 안전에 투여될 비용을 줄이게 되니까 사고는 줄어들 수 없는 겁니다. 거의 모든 사고가 구조조정과도 깊은 연관돼 있어요.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같은 경우도 역무원들을 급격하게 퇴직시킨 직후에 사건이 터졌죠. 역무원 한 명만 더 있었어도 200여 명이 죽지 않았죠. 위험한 공사를 하청에 떠넘기는 문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요. 제 생각에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무엇보다 피로도입니다. 피로가 많이 쌓이는 작업장에서 주로 대형 사고가 일어나죠. 피곤한데 이거 챙기고 저것 챙기지 않죠. 그건 노동자 탓이 아닙니다. 비용을 줄이니까 과중한 피로가 쌓이는 거죠. 결국은 ‘자본의 살인’인 겁니다.”
⑥비용 절감-과중한 피로-대형사고는 ‘자본의 살인’
-현대중공업을 나온 뒤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그 뒤로도 몇 군데 더 일했었어요. 노조 활동을 위해 더 열악한 업체에 다닌 적도 있어요. 알루미늄 공장에서 용광로 일도 했습니다.”
- 40대 이미 유명 노동자 시인이었습니다. 일종의 위장 취업이신데.
“지방은 블랙리스트가 심각하지 않았어요. 1987년 이후에는 대졸 출신들이 대거 울산에 내려와서 위장 취업을 많이 했는데 지역 사정을 잘 모르니까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그들에게 현장 노동자들과 관계를 만들어주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1989년에 노동 상담과 교육을 목적으로 활동가들과 노동자 교육과 법률상담을 하는 ‘노동자의 집’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제가 소장을 맡았습니다만 곧 구속이 되었죠. 첫 시집 인세로 전화를 놓고 내부 공사비로 사용했습니다. 노동운동 자료실도 만들어 운영하였고,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현 공추련)도 제가 발의해서 시작했습니다.”
- 다시 시집 이야기로 돌아가서, 2024년에 등단 40주년이었는데요.
“지역엔 작가들이 많지 않습니다. 지역 후배들이 40주년 행사를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하지 말자고 그랬습니다. 그동안 해온 문학의 영향력이 커진 게 아니라 졸아들었는데 무슨 기념행사를 하겠습니까. 기념할 만한 게 뭐가 있겠냐는 심정이었죠.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칠 형편도 아니니까 그만하자, 그랬던 겁니다.”
- 시집 관련 인터뷰는 그간 하신 게 별로 없더라고요.
“시집을 내면 창비를 통해서 연락이 오죠. 인터뷰나 취재에 협조를 해줘야 할 형편인데 저는 그게 적성에 맞지 않아요. 여태 SNS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래저래 얼굴 내고 다니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요. 문학 행사에도 꼭 가야 할 사정이 없으면 가지 않습니다. 작품에 자신의 감춰둔 부분까지 노출했는데 얼굴까지 내미는 일이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문학의 긴장도도 많이 떨어졌으니 문학활동도 작품활동에 그치는 거죠.”
- 문학의 긴장도라는 말을 더 풀어주시면.
“문학 자체가 외부와의 접촉면이 많이 줄었습니다. 80년대 문학은 그 자체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제는 문학이 문학인 안에서만 소비되는 경향도 커졌습니다. 언론에도 문학기사나 문인들 소식란도 많이 줄지 않았나요? 노동이나 민중의 문제를 드러내는 문학에 대한 관심은 더 줄어들었죠. 시인들도 우리 사회 문제나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 않죠. 게다가 노동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책을 읽지 않아요. 기성 문학이 청년 노동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노동문학이 지식인들에게 주로 소비된다는 게 정상인가 싶기도 하죠.”
⑦문학은 소수자의 억압된 목소리를 대변해야
-푸른사상 시선 머리말에서 문학의 시선이 소수자를 향해야 한다고 적으셨는데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은 패자의 목소리’라는 말이 있죠. 문학은 소수자의 억압된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될 테죠.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런 거죠.”
-새 시집에 ‘인류세’가 시어로 등장합니다. 소수자를 동물들까지 확장하면서 염두에 두신 게 있나요.
“1987년 이전에는 노동운동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어요. 노동운동은 사회민주화운동의 기반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죠. 제가 울산에 와서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공단 개발을 하면서 자연 파괴와 심각한 공해 문제였어요. 잘 살자고 시작한 일이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는 모순된 상황은 단순히 산업화의 부작용으로만 보이지 않았던 거죠. 주민들이 여러 공해병에 많이 시달렸어요. 당시에는 이타이이타이병이라고 중금속인 카드뮴 중독과 관련된 병입니다. 일본에서는 수은 중독과 관련된 미나마타병이 큰 이슈가 되었죠. 당시 공해병은 분명하지만 기업과 정부에서 감추기 급급했죠. 많이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피해를 받았죠. 갑자기 뼈가 부러진다든가 이유 없이 죽었지만 그 원인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어요. 복합오염에 의해 생긴 병인데 정부에서 은폐하기에 급급했어요. 내가 처한 노동의 문제와 환경생태 문제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라고 봤습니다. 억압되고 왜곡된 상황을 견딜 수 없었어요. 저는 학습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사회활동을 시작한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자기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 인간 생명이 자신의 가치를 올바로 실현할 수 길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이 좀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기 생명의 회복력을 생각해온 거죠. 노동운동도 그런 차원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운동가들과 입장이 달랐고 점차 소원해 졌습니다.”
-‘백무산’ 하면 여전히 노동자 시인, 노동 시인 인식이 강합니다. 노동문제와 거리를 둔 것인가요.
“저의 관심이 노동문제에서 비켜난 것 같지만, 사실 현대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삶의 뿌리까지 연결된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생각하는 것은 곧 노동의 정의와 연결된다고 본 것입니다. 자본 아닌 것이 없고 노동 아닌 것이 없는 거죠. 노동문제는 분배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부자 되기 위한 노동운동이라면, 소비를 더 많이 하기 위한 노동운동이라면 그건 결국 자본과 협력적인 공범이 될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노동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죠. ”
⑧부자되기 위한 노동운동은 자본의 협력적 공범이 될 뿐
- 지금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자본주의 노동은 어떻게 개선이 되어도 인간적인 노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농경사회 이전까지 해온 노동은 생태노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후와 계절과 시간에 적응하면서 노동을 해 왔죠. 산업노동처럼 모든 시간에 균일하게 신체를 적응하는 노동은 기계노동이지 생체 활동이 아닌 거죠. 극단적으로 분업화되고 자율성 없이 수동적으로 하는 노동은 생체를 기형적으로 만듭니다. 분업화되고 수동화된 노동은 정신의 구조도 불구화합니다. 노동자들이 왜 보수정당에 투표하는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지 못하는 것은 왜인지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고 합니다. 노동운동가들은 그래서 노동자에게 의식화 교육을 많이 해야 한다고 결론 짓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수동적인 노동 습관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노동자가 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 길든 존재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수동화된 기계이므로 누군가 명령이 있어야 움직이는 존재가 됩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강력한 지도자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습관적으로 바라게 되죠. 진보정당 운동이 지지부진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고 수행하기보다 누군가 뛰어난 지도자에 의지하고 추종하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가집니다. 확대해서 보면 삶의 모든 문제에서 위계적인 질서를 반복해서 만들어갑니다.”
- 문명화, 도시화한 사회에서 생태 노동, 자율 노동으로만 살아가는 게 가능할지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생활이 좋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과 싸우면서 자신은 건강하게 사는가에 대한 반성과 질문을 스스로 한 거죠.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 억압을 내면화하고 자기 주변에 대해서 억압적인 사람이 되죠. 그래서 노동 자체는 큰 변화가 없어도 노동환경과 사업장 분위기, 지적 관심이 확대된 점 등 사회활동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모두가 생태노동과 자율노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자신이 하는 노동이 어떤 것인지 직시하고 스스로 다른 변화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의지가 중요하죠.”
- 작가들의 제도권 정치 참여에 비판적인 걸로 압니다만.
“작가들의 정치의식이 제도권 정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사회 변화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작가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권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현실에 질질 끌려가지는 말아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제도권 정당의 당원 수준으로 정치와 세상을 바라보고 그걸 정치의식라고 생각하는 것은 좀 안이한 생각입니다.
⑨거대 양당체제가 시민 비판정신까지 제한
- 제도권 정당 중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1987년 이후 나는 소수 정당만 지지해 왔어요. 모두 5% 지지도 받지 못하는 후보에게만 투표해서 내 표로 당선된 사람은 대통령에서 시의원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1987년 이후 38년 동안 모든 선거가 똑같은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어요. 후보단일화와 비판적지지로 소수 정당은 계속 소외되고 배제되니까요.”
- 양당제 체제가 문제라고 들립니다.
“거대 양당체제가 시민의 비판정신까지 제한하고 있다고 봅니다. 누가 양비론을 펼치면 막 욕하는 분위기잖아요. 양비론을 펼치면 둘 가운데 더 나쁜 놈이 이익을 본다고 비난하죠. 덜 나쁜 자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정당화하죠. 현실을 직시하라는건데 이건 단순히 양당제 사고습관일 뿐입니다. 이게 38년 동안 계속되고 있어요. 이것은 다른 세력, 다른 전망을 계속 억압하는 거죠, 어떤 지식인이 쓴 칼럼을 보니까 글의 첫머리에 ‘나는 양비론자가 아닙니다’라고 글을 시작하더라고요. 이것도 자기 검열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에 실린 ‘겨울비’라는 시에서도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라고 쓰셨는데요.
“제가 여태 원고 청탁을 받고 두 번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노무현, 문재인 때입니다. 원고를 줬는데 그쪽에서 나한테 시큰둥한 목소리로 ‘이제 민주화됐잖아요!’ 항의 투의 말을 하더라고요. ‘아니 그걸 왜 너희들이 판단하냐’고 그랬죠. 그래서 (원고를) 없애버렸지만, 그런 일이 있었고요.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보수를 이롭게 한다고 취급을 해버리죠.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많이 경직돼 있고, 그런 대결 구도를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유리하기도 하기 때문이겠죠. 우리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든 아니든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실 제 주변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시민사회운동 영역이 거의 정당정치 활동으로 변해버렸습니다.
- 그 뒤로는요.
“사회 변혁 운동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어느 단체에서 기후위기 관련해서 얘기를 좀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제 강연이 끝나고 가려고 하니까 (윤석열 정권 때인데) 민주당에 서 활동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하는 소리가 ‘환경 문제를 가장 잘하는 방법은 정권을 바꾸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황당한 거예요.”
⑩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면 보수를 이롭게 한다고 취급
-강연 때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인간의 욕망과 존재 방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얘기를 했어요. 우리가 뭐 줄이자, 절약하자, 자발적으로 가난하자, 이거 안 되잖아요. 이대로는 욕망을 줄이고 윤리적으로 생각한다고 삶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러니 욕망 자체에 대한 자기 성찰이나 인간 존재 방식에 대한 사고가 없으면은 변하지 않는다. 뭐 그런 얘기였는데, 정권을 바꾸면 되는데 복잡할 게 뭐 있느냐는 것이었죠. 이제 시민사회 운동은 왜소화되고 제도권 정당정치로 관심이 쏠려있어요. 푸코는 ‘저항은 없다’고 합니다. 권력이라는 기차를 함께 타고 있어서 그 안에서 아무리 싸워도 같은 방향으로 갈 뿐이라는 거죠. 현실을 무시하고 본질을 보라는 말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도 변화의 대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문학정신은 제도권 바깥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이번 시집 중 ‘사람의 한자리’에서 “이 나라에 성공한 대통령 하나 나오지/ 않았다고 자책들 하지만/ 대통령이 성공을 해도 되는 건가?”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그들이 계속 오해하는 건 무슨 성공을 바라는 일/ 나라를 이끄는 데 성공한 자리라는 생각/ 국민을 통치하는 데 성공한 자리라는 생각// 그러나/ 그 자리는 인간이 비어 있는 자리이기 때문인데/ 자신의 그 자리가 가해자의 성공의 자리라는 걸/ 안다면 성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사람의 한 자리’ 중)
“정치적 이야기라기보다 특별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기 가족들보다 더 자주 한 사람을 지켜보며 삽니다. 대통령을 보면서 시민들은 박탈감과 모멸감을 느껴 왔습니다. 윤석열이 대통령일 때 그 시를 쓴 건데, 그는 권위주의시대 대통령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시민을 내려다보았죠.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의 의미도 모른다고 단정하기도 했죠. 그것은 바로 피의자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시민을 피의자 대하듯이 했죠. 시민들에게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뭐냐고 다그치듯이 말했죠. 경제만 잘 되게 해주면 될 게 아니냐는 식이었어요. 사실 모든 대통령이 그래야 성공한다는 식으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만 그 때문에 모든 대통령이 실패했다고 봅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상징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간신히 버티고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죠. 대통령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요. 서민들이 정말로 간신히 자신을 다독이며 살고 있습니다.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죠. 진심으로 우리와 함께 삶의 불안을 견디며 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말은 의미 없는 말입니다. 모든 ‘국가적’이라는 건 대체로 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한 일이니까요.”
⑪‘국가적’이라는 것들은 대체로 시민의 삶과는 무관
- 계엄 보름 전인 2024년 11월18일 한국작가회의 소속 1056명의 윤석열 퇴진 시국선언에 이름 올리셨는데요, 윤석열 탄핵 사건을 어떻게 보았는지요.
“탄핵 심판날인 2025년 4월 4일 그 시각에 저도 헌재 앞에 있었어요. 탄핵 선고가 떨어지니까는 시민들이니 만세를 부르고 춤추고 그랬어요. 내게는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즐거울 일도 신날 일도 아닌 것 같았거든요. 사회 비용을 이만큼 낭비를 했는데 승리했다고 하니 더 이상했어요. 우리가 여태 한 게 뭔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모든 것 바쳐서 노동운동을 20여 년 하고 났더니, 가장 추잡한 자본가 이명박이가 대통령이 되었잖아요.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피나는 민주화운동을 했는데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때 심장이 막 끓어오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땐 민주주의 성장이 덜 되었다 치더라도,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민주화운동 37년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참 황당하죠. 유럽에서도 극우세력이 집권을 바라볼 만큼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죠. 오래전에 읽었던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 글이 생각났어요. 우리가 생태계 하면 자연생태계만 생각할 때 그는 세 가지 생태계 위기를 경고했죠. 사회 생태계, 인간 생태계, 자연 생태계 위기를 경고했습니다. 인간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를 우리 현실과 어떻게 연결해서 생각해야 되나 고민했지만, 거창한 고민이 아니고 인간과 나 그리고 문학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부러 그 자리에 가신 거예요.
“일부러 갔어요. 박근혜 탄핵 심판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멀리서 중계방송을 봐도 되지만 현장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몸과 몸이 만나지 않고 스마트폰을 보고 다 안다고 생각하면 많은 것을 놓치죠. 문학에서도 몸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쓸데없이 난해해지고 있습니다.”
- 다시 시집 이야기를 여쭙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를 표제작으로 정한 이유는요.
“이 시에 ‘내게 없는 내 기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라는 구절이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어야 내 기억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기억하지 않는 기억이 존재할까요? 숲이나 바다 같은데 가면 어떤 기시감이 들기도 하고 나 자신 만큼 친근한 무엇을 누구나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착각이라고 느끼고 말죠. ‘어제는 우리 모두가 섞여 있었다’는 표현도 있는데, 실제 모든 몸은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고유한 몸이 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적 활동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있어요. 그렇게 찾아오는 직관으로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지요. 이것 역시도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지각 활동입니다.”
-생태의식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연과 우리는 한 몸이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공생 공존을 말하지만 직접적인 공감 없이 의식의 표면에서 그치죠. 구체적이고 생명 자체에 대해 몸을 통한 지각 활동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윤리적 당위성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확장될 수 있어야 되는 거죠.”
다음은 시집의 ‘시인의 말’이다.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흔히 역사에 그 질문을 던지지만 역사는 현실에 알리바이를 조작해주는 공범자이기도 해서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머나먼 시선’으로 자주 눈을 돌려보게 되었다. 그 시선은 시간은 시와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시간은 인간의 감각적 경험이고, 시는 그때 그 시간을 담아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미래가 현재를 먹어 치우고, 살아 있는 ‘어제’는 죽은 사물이 되어 오늘은 덧없이 얇아져 부서지기 쉬운 그릇이 되고 만 것 같다. 현재는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생애의 시간 전체의 두께에서 일어나고, 지질학적 시간도 우리 생애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은 자신의 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라는 공유지에 우리 모두 섞여 있었고, 그것은 과거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오늘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장소일 것이다. 시에는 어떤 통로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저 어떤 입구에서 난감해하고 있을 뿐이다.
2025년 입동 무렵 백무산
⑫효율과 속도의 기계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유목 정신 회복해야
- 이번 시집에 ‘기계세가 도래했다’고 쓰신 게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이야기 듣다 보니, 세상 현실은 별로 변한 것 없는 듯도 합니다.

”인류세는 인간 행위로 인한 지구환경의 극적인 변화를 지질 시대로 구분해서 부르는 용어입니다. 기계세라는 말은 인류세에서 말하는 인간 행위는 인간 고유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화되어 저지른 일이 아니냐고 제가 비유적으로 말한 것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현대 인간은 효율과 속도의 기계가 되어 스스로 자기 자신이 만든 기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던져본 겁니다.“
- ‘가자 지구’ 참상을 그린 ‘사랑은 사랑을 모르지’에서 ‘무신론자도 신을 발견할 것 같은 도시’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무신론자이신지요.
”그렇지 않아요. 창조주, 유일신을 믿지 않는 거지 신은 만물에 깃들어 있고 세계는 중층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어요. 물질처럼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요.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20여 년 전에 읽었는데 읽으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후에 <지상 최대의 쇼>라는 책도 읽었는데 우리가 예전에 인간을 생체기계로 바라보던 기계적 유물론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문학 공부는 계속하시는지요.
“저는 문학 공부를 따로 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학에 스승도 선배도 당연히 없어요. 잡다한 종류의 책을 읽다가 문학에 머문 시간이 많아졌을 뿐입니다. 최근에는 문학이 가장 근접한 게 인류학인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인간 문제를 ‘머나먼 시선’으로 다루는 책에 한동안 관심이 쏠렸습니다.”
- 아까 레비스트로스를 읽는다는 것과 이어지는 답변 같네요.
“‘머나먼 시선’이라는 말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말입니다. 구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좀 들여다봤는데, 그러다가 역사 이전의 역사인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로 관심이 옮겨 갔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주의’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 향후 계획은요? 예전 이 질문에,‘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겠죠’라고 했는데요.
“요새는 딱히 저한테 요구하는 게 없어요. 시대적 요구라는 것도 있고 현실적이고 집단적 요구라는 것도 있는데, 노동 쪽이든, 문학 쪽이든 시민단체든 긴장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사회적 열정은 아마도 제도 정치권 쪽으로 많이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관심이 과열되어서 오히려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낮은 곳에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을과 노동과 지역의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 생태적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시 ‘한국방문을 마치고’ 중 “이방인은 아니다/ 그저 떠돌았던 유목민이었을뿐이다 방문을 마치고 나는 또 돌아간다/ 처음 발 딛는 곳으로/ 돌아가는 곳은 언제나 처음 가는 곳이다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선생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가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요. 유목 정신을 생각하면서 쓴 시입니다. 요즘 저는 유목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주민이 만들었습니다. 정주민은 땅을 지키고 영토를 넓히려는 욕망을 통해서 자기실현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의식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농경생활은 매우 짧았습니다. 유목민은 생활할 뿐 소유하지 않습니다. 에릭 호퍼 같은 철학자는 인간성이 원래 유목생활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과거 같은 유목생활로 돌아갈 순 없지만, 유목 정신을 회복하는 일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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