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계에 이런 ‘성장캐’가 또 있었나 [콘텐츠의 순간들]
대중음악계가 자주 쓰는 단어 가운데 ‘성장’이 있다. 알을 깨고 나와 세상과 만난 음악가는 자동으로 무한 성장 모드에 돌입한다. 소년, 소녀는 언젠가 남자와 여자로 ‘돌아와야’ 한다. 앨범을 기준으로 한 성장은 음악가의 존립과도 직결된다. 전작과 비교한 음악·음악가의 성장 여부는 곧 앨범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 당연히 발매작이 쌓일수록 부담도 커진다. 사정이 더 복잡해지는 건 ‘성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음악가에게 ‘성장’이란 무엇인가. 생물학적 나이가 들면 성장인가? 이전과 180도 달라지면 성장인가? 편곡이 화려해지면 성장인가? 장르 음악적 색채가 도드라지면 성장인가? 관조적 자세가 노랫말에 드러나면 성장인가? 그래서 성장은 뭘까?
그간 너무 많은 성장 확인서를 남발해오지 않았나 하는 반성 속에 남매 듀오 악뮤(AKMU)가 서 있다. 2012년 악동뮤지션으로 처음 대중 앞에 선 이래, ‘성장’은 이들에게 운명처럼 매달린 긴 꼬리표였다. 우선 데뷔 무대의 속성부터 그렇다. 남매가 처음 출연한 SBS 서바이벌 프로그램 〈케이팝스타 2〉는 경쟁을 통해 최후의 1인을 뽑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주요 키워드 가운데 ‘성장’이 있다는 걸 모르는 시청자는 없다. 심지어 프로그램이 끝난 뒤 받아 드는 실제 활동 성적표도 ‘성장캐’가 월등히 뛰어난 편이다. 성장은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고, 음악가를 대표하는 성질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악뮤는 성장에 목마른 시청자를 여러모로 만족시킬 수 있는 궁극의 ‘성장캐’였다. 우선 나이부터가 설정 과다였다. 2012년 당시 이찬혁의 나이는 16살, 이수현은 13살이었다.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에서 한참은 더 자라야 할, 비유가 아닌 실제로 성장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할 나이였다. 악뮤가 만드는 음악과 무대에는 언제나 그 에너지가 살아 꿈틀댔다. 만약 이들의 노래가 어른들을 흉내 낸 알량한 것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할 일도 없었을 터이다.
악뮤가 부르는 노래는 더도 덜도 아닌, 16살 찬혁이와 13살 수현이가 생각하고 느끼는 세상 자체였다. 그래서 사랑받았다. 다리를 꼬고 내 말이 진리라며 꺼드럭대는 상대에게 소심한 원투 펀치를 날리고(‘다리 꼬지 마’), 밤새워 놀다 낮 12시쯤 일어나 어제 먹고 남은 ‘반쪼가리’ 라면에 처량한 신세를 투영하는(‘라면인 건가’), 가진 건 없어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푸름. 살아 있는 순간 그대로를 박제한 악뮤 두 사람의 마음과 이야기는 금세 넓은 세상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 가지에 맺힌 꽃과 잎과 열매는 짧지 않은 시간 수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가득 핀 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가지가 늘어지게 달린 열매를 따서 사이좋게 나눠 먹기도 했다. 무성한 이파리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떨어지는 낙엽에 세월의 흐름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그런 14년이었다.
궁극의 ‘성장캐’들이 주는 뭉클함
나이와 발을 나란히 맞춘, 그러나 절대 범상치 않은 사유는 악뮤의 성장을 지켜보는 가장 큰 재미였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것 하나만은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악뮤를 옆집 사는 동생이나 오랜 친구처럼 친숙하게 느끼며 가볍지만은 않은 그들의 음악을 자연스레 곁에 두었다. 같이 놀자며 천진난만하게 손을 내밀던 이들은(〈플레이(PLAY)〉) 흔들리는 사춘기를 자신의 음과 말로 속속들이 고백하다가는(〈사춘기 上, 下〉), 이제 닻을 올려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해보고 싶다고 외쳤다(〈항해〉). 그 모든 여정에 사람들은 기꺼이 함께하기를 택했다. 앨범 발매마다 화제를 모았고, 히트곡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삶은 음악이 되고, 음악이 사람을 모았다.
2026년, 오래된 둥지를 떠나 비로소 홀로 선 이들이 새로운 출발을 말했다. 7년 만의 정규앨범 〈개화〉다. 이미 수백 송이 꽃을 피운 이들이 다시 지금의 자리에서 새로운 꽃을 피워보겠다는 선언이다. 남매는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오빠는 군복무를 마쳤고, 혼자 남은 동생은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모두가 성장을 지켜본 악뮤라는 안락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이찬혁 이름 세 글자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돌아온 오빠는 동생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앨범 발매 전 유튜브에 공개한 ‘악뮤(AKMU): 더 패스트 이어(THE PAST YEAR)’ 영상은 새로운 꽃을 피우려는 이들의 준비운동이 절대 만만치 않았다는 증거다. 오빠는 ‘내가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라 했지만, 동생을 비롯한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랑을 영상으로 풀어내면 저럴 거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세상에는 분명 있다는 걸.
앨범 〈개화〉의 탁월함과 뭉클함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전주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찬혁 특유의 개성 강한 송 라이팅은 연둣빛 새싹으로 뒤덮인 봄의 들판을 연상시키는 컨트리풍 음악에 실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간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깊은 성찰을 아침 이슬처럼 전달하는 타이틀곡 ‘기쁨, 슬픔, 아름다운 마음’이나 동생 이수현을 위해 만든 ‘햇빛 블레스 유(Bless You)’는 물론 ‘낙원’과 ‘난민’이라는 묵직한 개념이 등장해도 앨범의 어느 곡 하나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엔 어떤 삶의 퍼즐을 노래로 지어 불러볼까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호기심 어린 남매의 모습만 떠오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새삼 깨닫는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이런 ‘성장캐’가 또 있었나. 기쁜 마음으로 다시 1번 트랙, ‘소문의 낙원’으로 돌아간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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