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와 ‘늑구’를 위한 변화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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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최근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탈출했다가 포획된 늑대 ‘늑구’ 사건 와중에 한 동물단체의 ‘동물원 보이콧’ 선언이 눈에 띄었다. “늑구도, 다른 동물도 보러 가지 않겠습니다.” 늑구가 동물원에 다시 전시되면 유명세 탓에 관람객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장 큰 책임자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되는 역설.
다른 경로는 없을까? 지난 2월, 타이의 코끼리 관광 시설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아시아 최대의 코끼리 생크추어리(퇴역하거나 구조한 동물을 보호하는 곳)인 코끼리자연보호소(ENP)를 창립한 생드안 렉 차일러트 대표를 인터뷰했다. 그는 2005년 타임지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될 만큼, 동물 관광의 낡은 패러다임에 맞서 깨어 있는 소비를 끌어낸 위대한 생산자였다.
그가 세운 코끼리자연보호소가 빛나는 이유는 끊임없는 자기 진화를 통해 시장을 바꿨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이곳 역시 다른 곳에서 코끼리를 임대해 오기도 했다. 그는 당시를 ‘웃음과 눈물의 시절’이라 불렀다. 치료해서 건강하게 만들면 주인이 다시 데려가 학대했기 때문이다. 한계를 깨닫고 그는 선언했다. “우리와 함께 코끼리를 자유롭게 해줄 생각이 아니라면 돕지 않겠다”라고. 그 뒤 오직 ‘매입’을 통한 완전한 ‘해방’만을 고집했다.
코끼리자연보호소가 진짜 생크추어리로 거듭난 이유는 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목욕시켜주기 프로그램’을 폐지했다. 계기는 70살 할머니 코끼리 ‘매 스리’였다. 주인 20명을 거치며 학대받다가 온 이 코끼리에게 관광객들이 물을 뿌리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차일러트는 결단했다. “내가 이 코끼리를 정말 아낀다면, 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오락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일러트는 밀어붙였다. 절반 가까운 여행사가 예약을 취소했다. 다들 코끼리자연보호소가 망할 거라 비웃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여행자들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관찰형 코끼리 관광’의 가치에 호응했고, 시장도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코끼리를 관람객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키지 않겠다는 원칙 덕분에 코끼리자연보호소는 확고한 정체성을 다질 수 있었다. 지금 보호소는 한해 10마리가량의 코끼리를 최대 3만달러(약 4500만원)를 들여 구조한다. 여행자들은 일반 코끼리 관광 시설의 1.5배 이상 비싼 요금을 기꺼이 지불하며 이곳에 들르고,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일주일 동안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현재 차일러트는 ‘새들 오프’(Saddle Off·코끼리 등 위의 의자를 벗기는 일) 프로젝트를 통해 인근 코끼리 시설들의 변화를 돕고 있다. 전통적인 트레킹을 포기하는 곳에는 마케팅과 예약을 무료로 지원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전까지 코끼리 시설 38곳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여행자가 표를 사지 않으면 시장은 알아서 바뀐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선한 속성을 믿는다.
어쨌든 타이에서는 ‘윤리적인’ 코끼리 관광이 유행이 됐다. 코끼리 트레킹을 하는 곳은 2024년 236개 시설 중 절반 밑으로 떨어졌고, 조련용 갈고리인 ‘불훅’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차일러트는 타이 도처에 널린 ‘윤리적’이라는 수식어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수많은 코끼리 체험 시설이 ‘생크추어리’, ‘윤리적’, ‘구조’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업계가 살아남기 위한 트렌드 마케팅일 뿐인 경우가 많아요. 어떤 캠프는 오전에는 코끼리 쇼와 트레킹을 하고, 오후에는 옆에서 윤리적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같은 조련사와 같은 코끼리가 옷만 갈아입고 하는 ‘가짜 윤리’죠.”

변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생산자의 양심과 소비자의 응답이 만날 때 시작된다. 야생동물 복원이나 종 보전이라는 명분은 분명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종종 동물원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2008년 대전 오월드 동물원이 한국 늑대 복원을 명목으로 러시아에서 이 종을 들여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파리라는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 개체 수를 불리고 전시했을 뿐, 다음 단계인 생크추어리 혹은 야생 방사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면 동물원에 갇힌 수많은 ‘늑구’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물을 구경거리로만 팔아 잇속을 차리려는 곳에는 단호하게 지갑을 닫고, 스스로 개혁해 동물의 안식처로 만들겠다는 이들의 진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곳에 동물원을 바꾸는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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