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고원이 품은 세 가지 이야기…전북 장수 여행

2026. 4. 2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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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전북 장수를 찾으면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다. 전주도 아니고, 남원도 아니다. 무주·진안과 함께 ‘무진장’이라 묶이지만 그 셋 중에서도 가장 안쪽이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고갯길인 집재를 오르고, 국도 고개인 비행기재를 넘으면 비로소 장수가 열린다.
장수 논개사당 앞 펼쳐진 의암호 풍경
전북 장수는 지도를 펼쳐보면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채 같다. 장수군 전역의 평균 해발은 400~650미터다. 분지 안에 읍내가 들어앉은 구조다. 하지만 주변 산지는 해발 1,000미터를 넘는다. 연평균 기온 11도, 8월 평균 기온 23.1도. 관측 이래 단 한 번도 열대야가 기록된 적 없다. 그런 까닭에 4월 초순이 지나야 뭍보다 조금 늦은 봄이 비로소 만개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곳을 ‘남쪽의 개마고원’이라고 부른다.

고갯길을 넘다 보면 공기의 질감이 바뀌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습도 낮은 바람이 옷깃을 훑고 지나가면, 비로소 장수에 왔음을 실감한다. 밤이 시원하면 낮에 쌓인 당분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사과가 단 이유, 한우 육질이 단단한 이유가 거기 있다. 장수는 기온이 만든 고장이다.

푸른 초원 위 뛰어노는 말, 이국적인 풍경
장수 장수승마체험장 전경
장수에서 말을 빼면 이야기가 절반쯤 빠진다. 군이 승마를 관광 핵심 콘텐츠로 키운 것은 20년도 넘은 일이다. 단순한 체험 관광을 넘어 말 산업 전반을 키우려는 시도였다. 고원 지대의 넓은 초지와 청정한 환경은 말 사육에 적합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승마 문화로 이어졌다.

현재 장수 승마의 중심축은 두 곳이다. 장수읍에 위치한 장수승마체험장과 장계면 육십령 자락의 렛츠런팜 장수가 그곳이다. 장수승마체험장은 장수읍 승마로 74번지에 자리한다. 약 3만제곱미터의 드넓은 부지 위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풍경은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 이국적이다. 이곳에서는 조랑말이 아닌 당당한 체구의 웜블러드(Warmblood) 종을 타고 직접 트랙을 달릴 수 있다.

장수승마체험장의 이국적 전경
체험 전에 헬멧과 챕스(chaps·종아리 보호대)를 착용해야 하는데, 모두 현장에서 빌려준다. 승마 모자와 챕스를 갖춰 쓰고 말 등에 오른다. 등에 앉으면 지면이 까마득히 멀다. 지면에서 뚝 떨어진 높이만큼이나 일상의 고민도 멀어진다. 네 마리가 한 조를 이뤄 트랙을 돈다. 처음 한두 바퀴는 느리게, 그 다음부터 속보로 전환한다.

처음에는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서툴지만, 십여 분 뒤 리듬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전신에 탄력이 붙으며 봄의 에너지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30분의 짧은 체험이지만, 말에서 내려올 때쯤이면 허벅지의 뻐근함이 승마가 얼마나 고강도의 전신 운동인지를 증명해 준다. 운동량이 보통이 아니다.

승마체험장 앞에 자리한 트로이 목마
승마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탁 트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승마체험장 앞에 자리한 커다란 트로이 목마가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렛츠런팜 장수는 성격이 다르다.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곳으로, 육십령 자락에 펼쳐진 광활한 이 목장은 대관령 목장이 부럽지 않은 풍광을 자랑한다. 직접 타기보다 말을 보고 먹이를 주며 가까이 두는 체험에 가깝다. 아이를 동반한다면 여기가 낫다.

말이 코를 들이밀고 손바닥의 당근을 받아 먹는 순간, 아이의 표정을 사진으로 남겨보자. 목장 뒤편으로는 육십령 능선이 뻗어 있다. 경남 함양으로 넘어가는 옛 고갯길이다. 능선을 따라 바람이 온다. 말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렛츠런팜 장수 전경
장수에서 논개를 다시 읽다
의암 주논개(義巖 朱論介). 논개는 한국 사람치고 이름을 모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대부분 비어 있다. 장수 여행에서 가장 묵직한 울림을 주는 곳은 논개의 발자취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른 사실들이 장수에서 새롭게 정립된다.

장수에서 만나는 논개는 ‘진주 기생’이 아니다. 그녀의 성은 주(朱)씨로, 몰락한 양반가의 딸이었다. 아버지 주달문은 훈장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집안은 기울었다.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시동생 집에 몸을 의탁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시동생은 미모의 조카 논개를 김풍헌이라는 부잣집 민며느리(데려와 키우다 성인이 되면 혼인시키는 제도)로 팔았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논개를 피신시켰으나 계약 위반으로 현감 앞에 재판을 받게 됐다.

논개가 그려진 의암사 전경
그 현감이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와 어머니를 구해주었고, 두 사람은 이후 그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다. 논개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논개는 부인을 잃은 최경회의 후처가 됐다. 관기가 아니었다. 현감의 아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최경회는 의병장으로 나섰다.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겼으나 이듬해 2차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졌다. 이후 논개는 스스로 진주 관기로 등록하고 왜군 잔치에 침투했다. 그리고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바위로 유인해 끌어안고 뛰어들었다. 두 손에 끼운 반지로 손이 빠지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논개가 태어난 주촌마을
논개가 태어난 곳은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다. 주촌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지금도 주씨 집성촌이다. 논개생가지(생가, 의랑루, 기념관, 연못, 단아정)와 주촌민속마을이 함께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논개의 생가는 4월의 햇살 아래 평화롭기만 하다. 생가 뒤편 주촌마을은 전통 굴피집과 죽데기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을 안에는 연자방아와 디딜방아가 남아 있다.

장수읍 두산리의 의암사(논개사당)는 더 생각해볼 것이 많다. 1846년 헌종 때 현감 정주석이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파괴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이 비를 땅속에 묻어 지켜냈다. 지금 의암사에 있는 비가 그때 숨겼던 것이다.

논개사당 앞에 펼쳐진 의암호 풍경
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 밤에 땅을 팠다. 그 행위가 사당보다 오래 남는다. 사당 앞으로 펼쳐진 의암호의 잔잔한 물결은 그녀의 숭고한 정신을 위로하듯 반짝인다. 장수 사람들은 논개를 진주의 인물로 두지 않는다.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란, 이 고원의 딸이라고 말한다. 그 마음이 사당을 지금도 살아 있게 한다.
천 리 물길의 첫 방울
장수는 금강이 시작되는 땅이다. 그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려면 뜬봉샘 생태공원으로 가야 한다. 장수읍 수분리, 19번 국도를 따라 읍내에서 8킬로미터쯤 가면 고개 수분재(水分峙)가 나온다. 재 이름이 이미 뜻을 담고 있다. 물이 나뉘는 고개. 지붕 남쪽 처마에서 떨어진 빗물은 섬진강으로, 북쪽 것은 금강으로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뜬봉샘 트레킹 전경
뜬봉샘 생태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여기서부터 걷는다. 왕복 4km, 경사는 제법 있다. 능소화 포토존을 지나고, 자작나무 숲이 나온다. 흰 수피가 빛을 받아 빛난다. 강원도 이남에서 자작나무 군락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곳이다. 소나무·잣나무·자작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가 계절마다 다른 냄새를 풍긴다. 봄에는 꿩의바람꽃과 태백제비꽃, 여름에는 산수국과 뻐꾹나리, 가을에는 구절초와 투구꽃. 걷는 내내 무언가 피어 있다.

정상 가까이에서 샘을 만난다. ‘금강 천리 물길 여기서부터’라는 표지가 서 있다. 물은 조용하다. 졸졸 흐르는 소리가 전부다. 이 물이 진안·무주·금산·공주·부여·서천을 지나 서해까지 397킬로미터를 흘러간다. 17개 시군을 적시며 흐르는 강의 첫 물방울이 여기서 땅을 뚫고 나온다.

뜬봉샘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얽힌 설화가 내려온다. 조선을 세우기 전, 이곳에 단을 쌓고 기도를 드렸는데 백 일째 새벽에 봉황이 날아올랐다고 전한다. 봉황이 떠올랐다 해서 뜬봉샘(飛鳳泉)인 것이다. 2024년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국가 생태관광지로 지정했다.

ㄴㅇㄹ
덕산계곡은 장안산 군립공원 안에 있다. 장안산은 높이 1,237미터. 1986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계곡 안에만 크고 작은 계곡이 26개, 연못이 7개, 기암괴석이 14개다. 수치가 아니라도 발을 들여보면 안다. 계곡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짙은 물빛, 주변을 덮은 활엽수의 그늘.

입구에서 데크 탐방로를 따라 오르면 아랫용소, 윗용소 순으로 소(沼)가 나타난다. 여기도 전설이 있다. 승천을 준비하던 두 용이 머물던 자리인데, 사람들이 물을 빼고 나무를 베어내자 아들 용이 분노해 소를 더 깊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알고 나서 물빛을 다시 보면, 색이 달라 보인다.

덕산계곡
덕산계곡
번암면 방화동의 자연휴양림 생태길은 2023년 산림청이 선정한 ‘걷기 좋은 명품 숲길 20선’에 들었다. 총 10킬로미터 풀코스지만 체력에 따라 구간을 끊어도 된다. 군립공원 주차장에서 출발해 방화동 자연휴양림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왕복 코스로 넉넉잡아 세 시간 반이 걸린다. 울창한 활엽수 아래를 걷는 길이다. 여름 한낮에도 그늘이 깊어, 계곡 소리가 길 내내 따라온다.

방화동 가족휴가촌은 1992년 국내 최초의 가족 단위 휴양지로 문을 열었다. 오토캠핑장과 목재문화체험장이 함께 있다.

논개사당 앞 펼쳐진 의암호 풍경
숲길의 끝에 서면 이 숲이 지켜준 것들이 느껴진다. 장수가 열대야 없는 고원임을 몸으로 확인하는 길이다. 장안산 동쪽 능선에는 억새밭이 있다. 10월이 되면 그 억새가 일제히 은빛으로 눕는다. 바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산 전체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장수는 계절마다 얼굴이 다르다. 봄에는 꽃, 여름에는 계곡, 가을에는 억새, 그리고 겨울에는 고요를 만날 수 있다. 어떤 계절에 와도 실망할 일은 없다.

장수 여행 정보
장수는 ‘레드푸드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한우, 사과, 오미자, 토마토. 공교롭게도 모두 붉다. 해발 500미터 이상 고랭지에서 자란 사과는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낮아 당도가 높다. 장수한우는 미네랄이 풍부한 물과 영양가 높은 초지 풀을 먹고 자란다. 지방량이 적고 육질이 단단하다. 고소하다기보다 담백하다. 장수한우명품관은 고원 지대에서 자란 육질 좋은 장수 한우를 합리적인 가격에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산서보리밥집은 시골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나물 비빔밥과 묵국수로 봄의 식욕을 돋우기에 좋다. 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나봄리조트나 타코마장수리조트가 편하다. 자연 속 캠핑을 원한다면 방화동자연휴양림 오토캠핑장을 예약하는 것이 좋다. 논개사당은 무료로 개방되지만, 숭고한 장소인 만큼 경건한 태도로 관람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26호(26.04.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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