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일 시키고 쪽잠 자며 감독… 실리콘밸리 ’24시간 무한근무'

실리콘밸리/강다은 특파원 2026. 4. 2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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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일과 휴식의 경계

미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한국인 박사급 인공지능(AI) 모델 연구원 박모(37)씨는 요즘 한밤중에도 2시간마다 일어나 컴퓨터 모니터를 확인한다. 이전에는 자정 정도까지 일하다 AI에 일을 맡겨놓고 잠들었는데, 이젠 중간 결과를 수시로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류가 나거나 메모리에 과부하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박씨는 “이전처럼 온종일 컴퓨터를 부여잡고 키보드 두드리는 일은 줄었지만, 24시간 내내 일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 AI가 단순 보조 도구를 넘어 동료이자 대리자·관리자, 구조 조정의 명분이라는 복합적 역할을 하면서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8시간 집중 근무’가 하루 24시간, 주 7일 ‘무한 근무’(Infinite Workday) 형태로 바뀌고, AI 기술을 통한 직원 감시, 고립되는 업무 환경 탓에 일터는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팬데믹 시대 자율성 극대화나 복지, 여유, 유연, 웰빙 같은 단어는 사라졌고, 계속되는 해고와 격변하는 기술 따라잡기에 불안감만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24시간 7일’ 느슨한 무한 근무

실리콘밸리 직장인들의 일 형태는 느슨한 24시간 근무로 바뀌고 있다. AI가 대부분 개발 업무를 맡으면서 사람 개발자 업무는 업무 지시와 중간 점검, 결과 검토로 줄었다. 밤을 새우거나 몇 시간씩 코드 짜느라 컴퓨터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졌다. 하지만 수시로 AI 업무 진도를 점검해야 한다.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AI 덕에 사람의 노동 강도는 낮아졌지만, 24시간 일하는 AI 때문에 사람도 쉬지 못하는 기묘한 동거 형태의 근무 스타일이 생겨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해 발간한 ‘워크 트렌드 인덱스(Work Trend Index)’는 업무가 이른 아침, 늦은 밤, 주말까지 번지는 무한 근무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지난 2월 “AI가 일을 줄이기보다 일을 더 쪼개고, 검토·수정·감시 노동을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버클리대 AI 소프트웨어 분야 연구자인 이모(31)씨는 “헬스장에도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AI를 돌려놓고 운동하고, 중간중간 컴퓨터를 확인한 뒤 다시 운동한다”고 했다. 근무 시간의 무한 확장은 일과 휴식의 경계를 더 흐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런 현상은 고비용 탓에 직원들의 AI 사용량을 제한하면서 가속화했다. 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AI 컴퓨팅) 이용자가 몰리는 시간대를 피해 주말에 일하는 엔지니어가 많다”고 했다.

◇삭막해지는 업무 환경

AI 도입을 서두른다는 이유로 빅테크는 직원들을 무한 감시·평가하고 있다. 21일(현지 시각) 로이터에 따르면 메타는 데이터 수집을 명분으로 직원들의 마우스·키보드 입력을 추적하기로 했다. 직원별 AI 사용량을 확인하거나, 사용량 순위를 공개하는 기업도 있다.

AI 시대 직장인들은 ‘도태 공포’(FOBO·Fear of Becoming Obsolete)에 시달리고 있다. AI가 대체해 언제든 해고될 수도 있다는 공포, 24시간 일하는 AI에 비해 생산성이 낮다는 자괴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기술을 따라잡기 위한 불안감 등이 일상화된 것이다. 블라인드·레딧과 같은 직장인 커뮤니티에서는 “(앤스로픽의 AI 모델인) 클로드와 일하기 전이 더 행복했다” “과거엔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든다는 성취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AI는 ‘타임 차지’라는 보수 방식도 바꾸고 있다. 타임 차지는 로펌이나 컨설팅 회사 등에서 활용해온 모델로 직원들의 시간당 노동력 가치를 책정해 놓고 고객사가 이용한 시간만큼 비용을 지급한다. 보수는 시간에 비례하게 된다. 하지만 AI 등장으로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나은 결과를 내놓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로펌들은 단기 수익 감소를 감수하면서도 AI 도입 속도를 높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대형 로펌 ‘롭스&그레이’는 지난해 입사한 변호사들에게 연간 청구 가능한 시간의 20%에 해당하는 400시간을 AI 실험·훈련에 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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