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된 계절을 지나 제자리를 찾은 닥터 지바고의 '시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1957)
너무 친숙해서 읽은 듯 착각하는 작품들이 있다. 서가에 오랫동안 꽂혀 있거나 요약본이 시중에 유통되는 게 많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전쟁과 평화』나 『죄와 벌』이 그렇겠다. 영화가 너무 유명해서 원전도 그렇겠거니 하고 안 읽어도 읽는 셈이 된 경우도 있다. 『닥터 지바고』가 그렇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미국과 소련이 체제 경쟁에 한창이던 195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소련은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때문에 동/서 어느 쪽에서도 오해되거나 왜곡되고 축소된 의미로 소비된 작가가 파스테르나크였고, 그런 작품이 『닥터 지바고』였다. 한쪽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프로파간다와 ‘라라의 테마’로 소비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비공식 문학으로 존재가 아예 ‘삭제’되었던 유리 안드레예비치(지바고의 이름과 부칭)의 이야기에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줄 때다. 드미트리 리하쵸프는 파스테르나크가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 책은 파스테르나크가 가장 솔직하게 쓴 그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평가한다.

죽음 뒤의 시를 향해 가는 서사
1903년, 10세 소년 유라(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의 애칭)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오래전 가족을 떠나간 아버지 이야기와 함께 유리는 삼촌(“역사란 시간과 기억이라는 현상들의 도움을 받아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인간이 구축한 제2의 우주라는 사상을 발전시켜” “톨스토이즘과 혁명을 거쳐 줄곧 앞으로 나아간 성직자”)에게 맡겨졌다가 그로메코 가족에게서 지내게 된다. 화학 교수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그로메코, 그의 아내 안나 이바노브나의 보호 아래 유라는 절친 미샤 고르돈, 그로메코가의 딸 토냐와 삼총사로 지낸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스승을 따라 위중한 상태에 빠진 프랑스 부인 아말리아 기샤르에게 갔다가 그녀의 딸 라라에게 주목하게 된다. 열여섯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워 보인 그녀 옆에는 늘 성인 남자 코마롭스키가 있었는데 지바고는 이 남자가 라라에게 어떤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미샤는 오래전 기차에서 목격한 일을 떠올리며 바로 그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코마롭스키가 유라의 아버지를 자극하고 압박해 선로에 떨어져 죽게 했다고 말한다. 김나지움을 졸업하면서 유라는 의학부로, 토냐는 법학부로, 미샤는 철학부로 가겠다고 결심한다.
어린 주인공들은 수년 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다시 만난다. 유라와 토냐는 즐기러 갔지만 라라는 착취자 코마롭스키를 저격하려고 간 길이었다. 총알은 빗나가고 이들은 다시 각자의 길로 헤어진다. 이후, 라라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철도 노동자의 아들 파샤와 결혼한다. 졸업 후, 그들은 우랄의 유랴틴 시에서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그곳에서 딸 카챠가 태어난다. 파샤는 군에 입대해 전장(1차세계대전)으로 떠나고 라라는 그런 파샤를 찾겠다며 간호병이 되어 전선마을 멜류제보로 간다. 유라와 토냐도 결혼하여 아들 사샤를 낳았다. 지바고(유라는 이제 닥터 지바고로 불린다) 또한 징집되어 군의관으로 전선 병원에 가는데 그곳이 멜류제보다. 그가 다쳤을 때 라라는 그를 돌본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가고 지바고는 모스크바로, 라라는 유랴틴으로 각자 가족에게 돌아간다. 아무리 일해도 당장에 먹을 것과 땔감도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봄이 되자 유리의 가족은 피난처를 찾아 토냐 선대의 터전이었던 우랄의 바리키노로 가기로 한다. 그들은 화물차를 타고 이동하며 (적군과 백군 간) 내전기 인민들의 고통을 목격한다. 한 역에서 지바고는 파르티잔 대장 스트렐니코프를 만나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정착한 유리는 글을 쓰기 시작하고 지역 도서관에 갔다가 라라와 재회하는데 그녀는 스트렐니코프가 자신의 남편 파샤 안티포프이며, 포로 생활 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밝힌다. 둘은 가까워지고 이에 괴로워하던 지바고는 토냐에게 고백하려던 찰나 무장한 남자들에 납치당해 적군 파르티잔 부대에서 부상자들 치료를 강요받는다. 내전이 막바지에 달하고 지바고는 1년 반 만에 탈출에 성공해 유랴틴으로 돌아온다. 라라에게 간 지바고는 토냐가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 것을 알게 된다. 곧 토냐의 편지로 그들의 임박한 해외(파리) 강제 추방에 대해 알게 된다.
유랴틴에서 숨어지내던 유리와 라라에게 코마롭스키가 찾아와 도주를 돕겠다고 한다. 공산당 비당원으로 파르티잔 지도자이던 스트렐니코프(파샤)의 아내 라라와 장인 알렉산드르 그로메코의 추방 등으로 마찬가지로 쫓기는 신세가 된 지바고에게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다. 제안을 거절하고 바리키노로 거처를 옮겨 유리는 시를 쓴다. 코마롭스키가 다시 찾아와 스트렐니코프의 처형 소식을 전하면서 유리에게 곧 합류하겠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라라를 안전한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로 자신이 데려갈 수 있게 하라고 말한다. 유리는 동의하고 라라는 떠난다. 죽었다던 스트렐니코프가 라라를 찾아 은둔해 시를 쓰던 유리에게로 온다. 그들은 밤새 모스크바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혁명에 관해, 무엇보다 파샤를 향한 라라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박한 죽음을 깨달은 스트렐니코프는 자살한다.

걸어서 모스크바로 간 지바고는 이제 의사 일도 접는다. 전에 자기 집을 관리하던 하인의 딸이 그의 세 번째 여자가 된다. 그녀에게서 두 딸을 얻는다. 유리에게는 이복 동생이 되는 옙그라프가 지바고의 생활에 도움을 준다. 무더운 여름날, 트램에서 내리다가 몸이 안 좋다고 느낀 지바고는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찾았던 라라가 우연히 지바고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이후 떠난 라라는 어디선가 체포되고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사망한 것 같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세월이 흐르고 유리의 절친들에게 세탁부 타냐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고 보니 이 아이는 유리와 라라의 딸이었고(라라가 코마롭스키와 함께 붉은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철도 경비원 가족에게 맡긴 것이었다), 유리의 동생 옙그라프가 그녀를 보호할 것이었다. 옙그라프를 통해 유리의 작품집이 세상에 나온다.
‘탁월한 시인의 실패한 소설’이라는 평가
파스테르나크의 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인생의 많은 일에서 실패한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해온 라라를 코마롭스키에게 빼앗기고, 의사로서도 제대로 일할 수 없었으며,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어 보이는 채로 죽는다. 소설은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매번 지적받곤 한다. 특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작품이 지니는 “서툴고 멜로드라마틱하며 진부한 입장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연의 연속”을 최고 수위로 비판했다. 그러나, 베냐민 카베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이 성공한 이유는 파스테르나크의 삶이 그 안에 녹아들어 한 세대의 이야기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식인의 죽음에 관한 그런 책은 달리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엔 예기치 않은 만남과 신비로운 우연, 기적적인 운명이 가득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닥터 지바고라는 인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구조의 서사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시인’ 파스테르나크가 구현하려 했던 것은 유려한 구조의 소설 스토리가 아니었다는 점은 재고할 만하다. 소설의 서사 구조 속에서 꺾이지 않는 시인의 서정을 존재 증명해내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엔 각자의 방식으로 혁명에 가담하고 맞섰던 사회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나 중심인물은 라라와 파샤 그리고 유리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있어 라라는 곧 민중이되 구시대적 현실(코마롭스키)로부터 착취당한 민중이다. 작은 의상실을 경영하는 어머니가 직원들의 파업을 마주하고 절망하자 어린 라라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사람들이 엄마만을 위해 파업에서 빠질 수는 없잖아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이름으로 약자를 지키고 여성과 어린이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거예요. 언젠가는 이 일로 엄마와 제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파샤는 혁명가다. 그런데 파샤가 혁명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라라다. 파샤는 라라를 지독히 사랑하고 라라와의 삶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여기나 코마롭스키로부터 능욕당한 그녀의 사정을 알고 난 후, 그녀에게서 어두운 기억은 모조리 몰아내겠다고 결심한다. 파샤는 그러한 혁명의 과정 없이는 자신에게 라라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길을 떠나고 라라의 사랑은 알지 못한 채로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는 1917년 혁명 이후, 내전으로, 전시공산주의로, 신경제정책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이행기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처절한 자화상이다(이를 반공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14장에서 떠나간 라라 뒤로 파샤와 지바고가 만나 사랑의 가장 보드라운 숨결을 회고하는 장면은 가슴 저미는 순간이다. 반면에 유리 지바고가 혁명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애매하다(그는 혁명 초기 곪았던 것이 이제 일시에 해결책을 찾았다며 반긴다). 소극적이고 무기력하기도 한 인텔리겐차인 그는 회의하면서도 그저 살아간다.

근 20년간 절필 상태로 번역에 기대 생계를 유지했던 파스테르나크는 1945년 장편 『닥터 지바고』 집필을 시작해 10년 만에 탈고했다. 시인은 세계 대전, 세 차례의 혁명, 내전과 기근, 신경제정책(NEP), 집단화, 스탈린주의라는 폭정에서 살아남은 세대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소설을 쓰려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그들 앞에 또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제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다. 첫 번째 버전을 끝내고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지금 블록과 저(그리고 마야콥스키, 아마도 예세닌) 사이에 일종의 결과물을 이루는 한 남자에 관한 장편 산문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1929년에 사망합니다. 그에게 시집 한 권이 남았는데, 이는 하권의 한 장을 이룹니다. 소설이 다루는 시기는 1903년부터 1945년까지입니다. 정신적으로는 카라마조프 가문과 빌헬름 마이스터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집필에 가속도를 붙인 것은 1953년 스탈린의 죽음이었다. 기대했던 문예지 『노비 미르』가 게재를 거부하자 국외로 반출, 1957년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처음 세상에 나왔고,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8년에 출간되었다.
에필로그에서 수년이 흘러 옙그라프가 편찬한 유리의 작품집을 읽고 있던 고르돈과 두도로프는 어스름 녘의 모스크바를 바라보고 있다. “비록 전쟁 뒤에 기대되던 광명과 해방이 생각했던 것처럼 승리와 함께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유의 전조는 전쟁이 끝난 뒤의 대기 속에 충만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예감이 전후의 유일한 역사적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 그들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의 그런 감정을 지지하고 확신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이 시편들을 떠받치기 위해 소설 『닥터 지바고』를 쓰고 이를 방편 삼아 소설을 썼다고도 할 수 있는 <햄릿>으로 시작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끝나는 시편들에서 파스테르나크는 눈보라 속의 촛불과 불에 타 잿더미가 된 무화과나무와 인간의 고통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4월과 유황불 옆의 막달라 마리아와 시작도 끝도 없는 공허한 나락을 전하며 “우리가 혼란에 빠져 무질서 속에 있을 때 <...> 어느 순간 불시에 덮쳐 오”는 기적처럼 다가올 ‘사흘 후’를 말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드러낸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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