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표, 메일, 스마트폰, 러시아, 노보데비치

김태옥 충북대학교 러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2026. 4. 2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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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김태옥 충북대학교 러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필라텔리, 필라텔리스트. '취미가 뭐예요?'라는 뻔하고 구태의연한 질문에 우표 수집이라고 답했던 이들이 있었고, 필자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요즘 세대의 대학생과 청소년들은 아마도 직접 우표를 만져보거나 우편을 보내는 데 이를 사용해 본 경험조차 없을 터이니,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 것 같다. 요즘은 우표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산골 시골이었던 필자의 마을에서는 우표를 살 수가 없어, 빨간 우체통에 해당하는 우표 가격만큼의 십 원짜리 동전 몇 개를 던져 넣었고, 우체부가 그것을 챙겨 가기도 했다. 우표를 통해 정부의 시책을 읽기도 했다. 70년대 말, 그네에 앉아 있는 형제의 모습을 그린 <둘만 낳자>, 그리고 80년대, 오른쪽 집게손가락 하나를 펴고 웃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담은 <하나 낳아 알뜰살뜰>이라는 문구를 담았던 우표는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인구 소멸을 이야기하는 지금 이 시대에서 본다면, 정말 기겁할 만한 내용의 우표이기도 하다. 부탄이라는 작은 국가의 국가적 부의 근원이 되었고, 아이티와 도미니카,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전쟁의 배경이 우표가 되기도 했으며, 일본도 독도를 자신들의 우표에 넣어 발행하려고까지 했다고 하니, 그 작은 우표 한 장이 한 국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함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그만두었던 우표 수집을 필자가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 2007년 2월쯤으로 기억한다. 저녁 늦은 시간 모스크바 남쪽의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둘러본 적이 있다. 1524년에 만들어진 이 유서 깊은 수도원은 2004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수도원 바로 옆에는 안톤 체호프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와 같은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니키타 흐루쇼프, 보리스 옐친 등의 정치가들이 잠들어 있는 노보데비치 공동묘지도 있다. 수도원 옆에는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백조의 호수'에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연못 하나가 있다. 그 연못을 내려다보는 위치에는 1988년에 문을 연 '우 피로스마니'라는 조지아 레스토랑이 있다. 모스크바에서는 크렘린, 볼쇼이 극장과 함께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꼽히는 유명한 식당이다. '백만 송이 장미' 노래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조지아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의 이름을 딴 이 식당에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리처드 기어, 피에르 가르뎅, 니키타 미할코프 등의 유명 인사가 다녀갔다.

눈 내리던 추운 겨울 오후 늦게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둘러보고, 노보데비치 공동묘지까지 둘러본 뒤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비치는 눈이 참 애틋했다. 어두운 시간, 조급해지는 마음과 함께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멈춰 세우는 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과 불안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상한 예감 하나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꽁꽁 언 손을 붙든 누추한 행색의 선한 눈을 한 50대 남자 하나가 우표책 두 권을 내밀며, 자신이 오래전부터 모아 오던 우표인데 이걸 좀 사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모아 왔을 수십 년의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우표들이 정성스레 보관된 낡은 우표책을 턱없이 낮은 가격에 제안해 왔다. 떨고 있는 남자의 입김과 눈빛, 거친 수염 주변에 담긴 간절함에 제안한 값보다 조금 더 치르고 두 권의 우표책을 들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거기서부터 다시 우표 수집이 시작되었다. 필자의 우표 수집에는 추운 겨울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맴돌고 있었던 한 러시아 중년 남성에 대한 추억과 그의 시간, 변화된 러시아의 삶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갑자기 며칠 전 보았던 손석희와 김애란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AI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는 존재하는 것, '망설임'. 그랬던 것 같다. 수많은 메일에 건조한 답변을 반복하며, 스마트폰 문자와 이모티콘, 컴퓨터 자판 등으로 순간순간 나의 사고와 감정을 상대에게 시시각각 전하는 조급함. 기다림과 느린 연결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러시아에서 다시 시작되었던 우표 수집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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