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보통의 일상, 그 찬란한 사탄의 탱고를 지나며

전남일보 2026. 4. 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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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경 전 완도중 교장

4월의 보통의 날들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늘 반복되는 계절이라 무심코 넘길 법도 한데, 이 나이가 되어 맞이하는 봄은 어찌 이리도 반갑고 고마운지요. 춥고 쓸쓸했던 긴 겨울을 견뎌낸 뒤라 그런지,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부산스럽게 피어나는 꽃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 꽃들이 피었다가 다시 지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쉼 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나이가 스승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예전 같으면 마음 한구석에 쓸쓸함이 찾아올 때면 안절부절못하며 서둘러 밝은 것을 찾으려 애썼을 텐데, 이제는 압니다. 이 쓸쓸함이 지나가면 곧 활기찬 날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이제는 조급해하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최근 헝가리 작가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소설 '사탄의 탱고'를 읽었습니다. 폴란드의 집단 농장이 무너지며 그곳에 남겨진 인간들의 군상을 그린 이 작품은 오랫동안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목처럼 앞으로 여섯 걸음 나아갔다가 다시 뒤로 여섯 걸음 돌아오는 탱고의 스텝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생은 '사탄처럼 달콤한 궤도'입니다. 우리는 그 궤도가 굴레임을 알면서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통의 일상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다 보면, 문득 지치고 무료한 쓸쓸함에 파묻히게 되는 것이 인생의 한 단면인가 봅니다. 우리나 저 멀리 낯선 나라 사람들이나 결국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4월은 그렇게 새로 시작했다가, 한소끔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시간입니다.

얼마 전 서울대학에 입학한 조카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에서의 멋진 캠퍼스 생활을 동경하며 떠났지만, 막상 닥친 타지 생활의 고단함에 아이는 눈물 섞인 어려움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아이 엄마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겠지요.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고 후회도 되겠지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은 입술 위에서만 맴돌 뿐, 가슴으로는 답답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기에 4월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잔인한 달입니다.

벚꽃이 지고 나니 이제 철쭉의 시대가 왔습니다. 벚꽃이 꽃눈처럼 내리는 모습을 보려 늘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면, 이제는 선연한 붉은색 철쭉을 보기 위해 눈높이를 낮춥니다. 멀리 바라보던 간절한 희망의 시선을 조금 거두고, 이제는 가까이 있는 현실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임을 꽃들이 일러주는 듯합니다.

올해로 벌써 12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아무 걱정 없이 해맑았던 그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망각의 힘을 빌려 보통의 일상을 견뎌내다가도, 이맘때면 어김없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슬픔을 가라앉혀야 하는 '사탄의 탱고'를 반복합니다. 소중한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내 곁에 존재해 준다는 그 보통의 사실이 가장 큰 행복임을 절절히 깨닫는 나날입니다.

문득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화려한 삶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지방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 나라를 움직이는 국회의원들, EBS 프로그램에 나오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들, 혹은 현란한 선율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들. 그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 재능을 보다 보면 평범한 나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보통의 사계절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럭저럭 하루를 살아내며, 우리 삶 속에서 무사히 성장하고 있는 자녀와 손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지구상의 모래알 수보다 은하계의 별의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나는, 어쩌면 바닷가 모래알보다 미세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아무렇지 않은 존재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얼마 전 한 친구로부터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겨울 내내 보이지 않아 몸이 약한 친구라 어디 아픈가 걱정했는데, 봄이 되어 만난 친구는 담담하게 남동생의 죽음을 전했습니다.

60대 초반에 홀로 살던 남동생이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 지 수십 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전기장판 위에 쓰러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사체를 마주한 누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원인 모를 통증과 슬픔에 시달리다 세상 밖으로 나온 친구를 보며, 죽음이 얼마나 불시에 우리를 공격하는지, 고독이 어떻게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 절감했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덧없습니다. 그렇다고 슬픔에 잠식당해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아프고 또 아파하다가 결국 회복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삶의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강신주 저자의 '망각과 자유'를 읽으며 장자의 가르침을 되새겼습니다. 저자는 '망각'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반드시 타인과 연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두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저마다 독특한 빛깔과 결을 지닌 특별한 직조물들입니다. 지구상에 똑같은 인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색과 빛으로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고와 아픔이 따르지만, 삶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로움과 독특함을 오롯이 누리며, 타인과 어울려 자기만의 색깔을 완성해가는 인생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잔인한 4월을 지나며, 다시 올 찬란한 5월의 햇살 아래서 우리 모두가 각자의 탱고를 꿋꿋하게 추어 나가길 기도합니다.
임효경 전 완도중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