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술 나누는 밤 / 노진화

송태섭 기자 2026. 4. 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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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단골 술집이 있어/ 술잔 기울이고 싶은 그런 저녁에는/ 신월성 청사포로 간다// 오랜 친구와 술 나누는 밤/ 지나간 생일들을 자축하며/ 시까지 읽는 밤/ 들어주는 귀 있어 춤추는 입/ 그동안 멀어졌거나 시들했거나 차가워졌거나/ 어두운 것들이/ 녹아내리는 시간// 달도 차지 않은 밤에/ 인생의 즐거움이 차오르네/ 오래 울지 않아도 되겠네.

그녀에게 술은 시름을 "녹아내리"게 하는 "시간"이자, 울음을 삭히는 예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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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시인·평론가)

내게도 단골 술집이 있어/ 술잔 기울이고 싶은 그런 저녁에는/ 신월성 청사포로 간다// 오랜 친구와 술 나누는 밤/ 지나간 생일들을 자축하며/ 시까지 읽는 밤/ 들어주는 귀 있어 춤추는 입/ 그동안 멀어졌거나 시들했거나 차가워졌거나/ 어두운 것들이/ 녹아내리는 시간// 달도 차지 않은 밤에/ 인생의 즐거움이 차오르네/ 오래 울지 않아도 되겠네.

『남아 있는 날들은 그림자도 떼어 놓고』(2025년, EUM)

'왜 술은 시를 닮았는가?'. 술이 시간의 압축이라면, 시는 언어의 발효다. 술과 시는 모두 있는 것을 다른 존재로 변하게 한다. 시가 의미를 흔들어 인식을 확장하는 방식이라면, 술은 의식을 흔들어 감각을 열게 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묘법이 술이라면, 시는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은유다. 술은 오래전부터 시와 깊이 얽혀 왔다. 마치 감정이 언어를 통해서 드러나듯, 술이 시의 내용이라면, "술잔"은 시의 형식이다. 다시 말해 시는 술이고, 언어는 술잔이다. 술잔이 없으면 술은 흩어지고, 술이 없으면 술잔은 공허한 껍데기다. 같은 술이라도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시흥(詩興)과 취흥이 달라진다. 괜스레 우울하거나,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밤은 '술 생각'이 간절하다. 그럴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단골 술집"이다. "신월성 청사포"는 노진화(1963~, 경남 삼천포 출생)가 이따금 들르는 횟집이다. 대구의 신월성(월배)과 부산의 청사포(靑蛇浦)를 갖다 붙인 간판명은 재미있다. 삼천포 여인인 그녀는, 이따금 '푸른 구렁이의 포구'에서 "생일"을 "자축하며" "오랜 친구와 술" 한 잔씩 나누나 보다. 취기가 오르면, 평소에 꾹꾹 눌러두었던 무의식이 자꾸 밖으로 기어나오게 마련이다. 엉엉 우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고래고래 고함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양처럼 순하다가 차츰 사자처럼 사나워지다가, 끝내 개차반이 된다. 하여, 술은 잘 먹으면 본전이다. 공연히 해방감에 '부어라 마셔라' 떡이 되어, 인생 종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반면 음주가무(飮酒歌舞)는, 잘만 놀면 멋진 풍류가객이 된다. 볼또그리 술에 취한 여인은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 하여, 노진화는 술을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찬양한다. 그녀에게 술은 시름을 "녹아내리"게 하는 "시간"이자, 울음을 삭히는 예술인 셈이다. 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술은 무위에 가깝고, 데리다의 관점으론 주체의 해체에 가깝다. 취기는 나를 잃는 방식이 아니라, 고정된 나를 뛰어넘는 과정이다. 어찌 되었거나 술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다층성을 드러내는 시법이자,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란하는 모호성에 비유된다. 즉, 술은 허무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인생의 묘약인 셈이다.

김동원(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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