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세 할머니의 레고랜드 도전…테마파크가 선물한 무장애 여행

김명상 2026. 4. 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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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관광지 선정된 레고랜드의 검증된 무장애 시설
장애인 친화 객실 갖춘 레고랜드 호텔의 세심한 배려
낮게 설계된 침대와 문턱 없는 곳이 주는 이동 자유
전국 명소 레고로 재현한 미니랜드에서 즐긴 눈 호강
할머니와 강아지 슈슈. 키우는 개는 아니고 잠깐 봐주셨다.

올해 우리 할머니는 만 103세가 되셨다. 학생 시절, 칼을 찬 일본 선생이 교실로 들어와 수업을 했다고 하셨다. 조선말을 쓰다 걸리면 맞기도 하셨단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의 순간, 6·25 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내신 분과 함께 살고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백 세가 넘으셨지만 치매 같은 질환은 없으시다. 심지어 책도 읽으신다. 다만 눈과 귀가 예전보다 어두워지셨고, 몇 해 전 무릎을 다치신 뒤로는 산책조차 힘들어하셨다. 최근에는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셨고, 가족들이 모시고 나가려 해도 “번거롭다”며 손을 내저으셨다.

창밖에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아침, 문득 할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하신 곳으로.

“할머니, 놀이공원 가봤어?” 손자의 물음에 할머니는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셨다. “그게 뭔데?”

자식도, 손주도 모시고 간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놀이공원은 젊은이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함께 가자고 권했다.

백 세 노인과 떠나는 여행, 만만치가 않네
레고랜드 입구 (사진=레고랜드 코리아)

며칠 뒤,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강원 춘천의 레고랜드로 향했다.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생각만 하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담요에 패딩까지 챙겼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이 날 수 있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길을 나섰다.

휠체어로 이동해 차에 힘겹게 오르신 할머니는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셨다. 춘천에 도착해 처음 찾은 곳은 막국수집이었다. 그런데 입구부터 막혔다. 휠체어가 오르기 어려울 만큼 문턱이 높았고, 내부도 좁아 자리 잡기가 어려웠다. 맛집이라고 일부러 찾아온 곳이었는데, 시설이 부족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막국수 전문점에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포기. 대신 닭갈비집 야외 공간에서 막국수를 드시는 모습.

결국 야외 공간이 넓은 대형 닭갈비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쾌적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했다. 바닥 곳곳에 장식용 돌이 깔려 있어 휠체어가 부드럽게 나아가지 못했고, 화장실 문턱도 높았다. 닭갈비를 먹기도 전에 이미 지칠 지경이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이동의 편안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시간이었다. 평소 죽만 드시던 할머니는 막국수까지 맛있게 비우셨다. 여행이 선사한 선물 같은 모습에 마음이 뭉클했다.

레고랜드, 문턱 없는 환상의 세계
장애인도 이동하기 쉽도록 조성된 레고랜드 호텔

식사 후 바로 레고랜드로 향했다. 많은 테마파크 중에서 레고랜드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스릴 넘치는 롤러코스터를 즐기실 수 없다. 회전목마조차 타기 어렵다. 대신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가득해야 했고, 무엇보다 휠체어로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전동 휠체어도 아닌 일반 휠체어를 밀며 거동이 불편한 어른을 모시는 여행. 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숙소 또한 중요했다. 피곤하시면 바로 들어가 쉬실 수 있어야 했다. 레고랜드는 그 모든 조건에 꼭 들어맞았다.

레고랜드 호텔 앞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둔 발레파킹이 이뤄졌다. 수백 미터 떨어진 주차장까지 걸어올 필요 없이 짐만 내려드리면 됐다. 입구에는 계단도, 문턱도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전과는 전혀 다른 여행이 될 것이라고.

장애인 친화 객실로 꾸민 레고랜드 호텔의 ‘프렌즈 테마 스위트’. 최대 5인이 머물 수 있다.

체크인은 빠르게 끝났다. 아바의 ‘댄싱퀸’이 흘러나오는 디스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오르는 동안 휠체어는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배정된 객실은 ‘프렌즈 테마 스위트’. 최대 5인이 머물 수 있는 장애인 친화 객실이었다. 일반 호텔과 달리 테마파크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은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환해졌다.

일반 객실보다 높이가 낮게 설계된 침대. 쉽게 오르고 내려올 수 있다.

장애인을 향한 가장 중요한 배려는 세심한 곳에 숨어 있었다. 침대가 일반 객실보다 낮게 설계되어 있었다. 덕분에 할머니는 부축 없이도 스스로 오르내리실 수 있었다. 화장실은 휠체어가 넉넉히 들어갈 만큼 넓었고, 변기에는 장애인용 안전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작은 배려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닌자고 테마 객실 (사진=레고랜드 코리아)

“할머니, 여기가 레고랜드야. 오늘 우리가 머물 호텔이야.” 귀가 어두우셔서 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레고가 무엇인지 모르실 터였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오롯이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신 듯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누워 있으면 손해다. 해가 좋을 때 나가야 했다. 우린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면서 움직였다. 호텔 복도는 양탄자가 깔려 부드러웠고, 쓸데없는 장식물이 없었다. 오전에 시내를 이동할 때와 달리 움직임이 확실히 편했다.

“이런 데가 다 있네”
레고랜드 내부 구경을 하시는 할머니. 첫 테마파크 체험이 낯설지만 재밌다고 하셨다.

평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레고랜드는 인파로 가득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때마침 레고랜드는 레고 닌자고 탄생 15주년을 기념한 ‘고 풀 닌자(Go Full Ninja)’ 시즌이 한창이었다. 2011년 첫선을 보인 레고 닌자고는 현재까지 인기를 끌고 있으며, 파크 내부에서 캐릭터들과 만날 수 있다.

닌자 공연을 진행하는 캐릭터와 배우들

식사 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아 사실 마음이 불안했다. 과연 파크 안에서도 수월하게 다닐 수 있을까. 하지만 걱정은 입장과 동시에 가시기 시작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실까 걱정했지만, 할머니는 구역마다 표정을 달리하는 테마파크의 풍경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피셨다.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시던 분에게는 어쩌면 신세계였을 것이다.

브릭스트리트 원형 광장에서 열린 공연. 관람을 하려는 인파로 가득하다.

브릭스트리트 원형 광장에서는 댄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닌자 댄서들이 등장하는 참여형 공연이었다. 어린이들의 함성에 광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기해하시던 할머니가 조용히 입을 여셨다. “이런 데가 다 있네…”

그 말 한마디가 한참이나 마음에 걸렸다. 삶에 치여 여유를 누릴 수 없었던 시대를 버텨온 분의 말이었다. 혼자서는 해외 테마파크도 다녀오면서 정작 이제야 할머니를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

닌자고 롤러코스터 ‘스핀짓주 마스터’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잠시 후 국내 유일의 닌자고 롤러코스터 ‘스핀짓주 마스터’ 앞에 섰다. 360도 회전하는 기구가 굉음을 내며 지나치자 할머니가 “워메!”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승객들의 비명과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롤러코스터를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셨다. “난 저런 거 타면 심장마비 걸리겠다.”

건너편 닌자고 월드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겨우내 방 안에서만 지내시던 할머니께 싱그러운 봄바람을 직접 선물해 드린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았다.

미니랜드를 찾은 할머니. 이곳을 제일 유심히 보셨다.

파크 안에서 할머니가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은 다름 아닌 ‘미니랜드’였다. 제주도, 부산, 서울, 충북 단양 등 국내 명소를 수백만 개의 레고 브릭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공간이다. 전에 방문했을 때는 놀이기구를 타느라 그냥 지나쳤던 곳인데, 이번엔 휠체어를 밀며 할머니와 나란히 둘러보니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경복궁 기와지붕 하나하나, 높이 솟은 남산 서울타워의 위용,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까지 레고 브릭 조각들이 빚어낸 작은 대한민국이 거기 있었다.

강릉 안목해변을 레고 브릭으로 재현한 모습

‘닌자를 찾아라’ 이벤트도 한창이었다. 고 풀 닌자 시즌에 맞춰 미니랜드 명소 곳곳에 닌자고 캐릭터 미니 피겨가 새롭게 설치된 것이다. 작은 인형들을 발견하실 때마다 할머니는 눈을 반짝이셨다. 제주도 미니랜드 앞에서 어머니는 한참 동안 설명을 이어가셨다. 여행을 잘 다니지 못하신 할머니께, 그 순간만큼은 전국 여행을 선사해 드린 기분이었다.

장벽 없는 공간이 주는 선물
화장실 문턱이 없고, 양변기에 장애인 보조 시설도 완비된 레고랜드 호텔의 객실

객실로 돌아와 할머니를 침대에 올려드렸다. 휠체어에 앉아 테마파크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빠지신 듯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 곤히 잠드신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여행을 준비하느라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레고랜드의 장애인 친화 시설이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유용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한 하루였다. 파크 전반에 걸친 문턱 없는 보행로, 충분한 너비의 자동문, 장애인 친화형 화장실, 휠체어 대여 서비스 등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또한 레고랜드는 장시간 대기가 어려운 이동 약자를 위해 놀이기구를 사전 예약해 우선 탑승할 수 있도록 돕는 ‘히어로 패스’도 운영 중이다. 장애인 등록 서류를 제시한 방문객의 보호자에게는 입장권을 정가 대비 64% 할인해 주는 우대 정책도 시행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2025년 열린관광지 조성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레고랜드

장애인이라 해서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니다. 레고랜드 일부 놀이기구는 휠체어에 탄 채로도 탑승이 가능하며, 보호자가 동승할 경우 전체 어트랙션의 85% 이상을 즐길 수 있다. 레고랜드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열린 관광지’에 이름을 올렸다. 무장애(Barrier-free) 관광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시설 개선 지원이 이뤄지면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마음 놓고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레고랜드 호텔의 조식당에 있는 대형 레고 모형

다음 날 아침 조식 뷔페에서 할머니는 비빔밥, 볶음밥, 미역국, 죽 위주로 드셨다. 뷔페 음식이 낯설었던지 남은 반찬을 가리키며 “이거 싸가야겠다”고 하셔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할머니는 무사히 레고랜드 탐험을 마치셨다. 감기에 걸리거나 넘어지거나, 낯선 잠자리에 힘들어하시는 일도 없었다. 103세 할머니가 1박 2일의 여정을 완주하신 것 자체가 작은 도전이자 큰 성취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여기저기 봄꽃이 피어 있었다. 할머니께 꽃구경 겸 드라이브까지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레고랜드에서의 이틀이 어떠셨는지 여쭤봤다.

레고랜드 입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할머니, 놀이공원 어땠어?”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오래 살다 보니 손주 덕분에 이런 데에도 와보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걸 보겠냐. 고맙다.”

레고랜드는 단순히 어린이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연로하신 103세 할머니도 손주와 함께 즐겁고 안전하게 봄날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어트랙션을 타지 않아도, 거창한 미식을 즐기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 안전하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그렇게 레고랜드는 우리 가족에게 평생의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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