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몰된 조선인 유골 섞어 ‘박스떼기’…일본이 감춰온 사진 17장

홍석재 기자 2026. 4. 22.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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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수천명 탄 우키시마호 폭침 유해
신원파악 고려 않은 듯 상자에 마구잡이로
“한-일 진상조사·유골반환 계기 되기를”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수습된 유골들을 현장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지켜보고 있다. 후세 유진 제공

1945년 해방 직후 조선인 노동자 수천명을 태운 채 폭침된 일본군 수송선 우키시마호를 5년이 지난 1950년 인양하는 과정에 수습된 희생자의 유골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 공개됐다.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후세 유진 기자는 20일 도쿄에서 한겨레와 만나 “일본 후생노동성에 정보 공개 청구로 확보한 공문서에 우키시마호가 인양됐던 1950년 당시 뭍으로 올라온 희생자 유골을 찍은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확보된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해 사진은 모두 17장이다. 1950년 3월31일 ‘마이즈루 복원(병역에서 해제된 군인) 및 잔무 처리 부장’ 명의로 작성된 ‘우키시마호 사망자 유해 처리에 관한 보고’ 문서에 포함됐다. 이들 사진을 보면, 인양 현장에 사람 것이 분명한 두개골 등이 수십개씩 놓여 있다. 일부는 신체 뼈가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사람 모양으로 배치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원 파악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러 유골이 대형 나무상자에 뒤섞이듯 담긴 경우가 많았다.

우키시마호 참사는 1945년 8월24일 조선인 수천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가던 배가 돌연 진로를 바꾼 뒤, 교토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폭침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승선자 3735명 중 조선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부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인 사망자가 수천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후세 유진 기자가 일본 후생노동성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청구로 확보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유해 처리에 관한 보고’ 문서에서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수습된 유골들이 나무 상자에 무더기로 담겨 있다. 후세 유진 제공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후세 유진 기자가 일본 후생노동성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청구로 확보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유해 처리에 관한 보고’ 문서에서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과정에 수습된 희생자 유골 모습을 볼수 있다. 후세 유진 제공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수습된 유골 가운데 인체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모습이 눈에 띈다. 후세 유진 제공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참사 뒤, 1950년과 1954년 각각 인양 작업을 벌였는데 이번 사진은 1차 인양 작업 당시인 1950년 3∼4월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이 포함된 문서에는 3월24일∼4월6일 다섯 차례에 걸친 촬영 일자와 ‘양수(수습)된 유해들’, ‘작업 현장’ 등의 제목이 붙었다.

특히 일부 유골은 신원이 확인된 듯 사진 옆에 희생자 것으로 추정되는 ‘○○씨’라는 호칭이 적혔지만, 이름 부분은 지워진 채 사진이 공개됐다. 또 이 문서에는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이 당시 상황을 “일본 해군 공창으로 징용됐던 한국인 작업자와 가족 등 수천명이 부산으로 귀국하던 도중 촉뢰(기뢰와 부딪힘)해 700여명이 구조됐으나 본체가 두동강난 채 침몰했다가 이번 인양에서 주검 58구가 수습됐다”(1950년 4월 13일치)고 기록한 기사도 첨부됐다.

일본 정부가 일본인 희생자를 25명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유골 상당수는 조선인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자 유골은 지금도 일본 도쿄의 절 유텐지에 여러 사람의 뼈가 뒤섞인 ‘혼골’ 형태로 안치된 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후세 기자는 “우키시마의 비극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전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사진”이라며 “유골 대부분이 일본에 남아 있는데 유가족들도 고령화되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한·일 정부가 유골 반환을 위해 움직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 프리랜서 언론인 후세 유진 기자가 일본 후생노동성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청구로 확보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유해 처리에 관한 보고’ 문서에서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과정에 관계자들이 유골 상태를 파악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후세 유진 제공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수습된 유골들을 현장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지켜보고 있다. 후세 유진 제공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수습된 대규모 유골들이 당시 현장 바닥에 놓여 있다. 후세 유진 제공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 참사와 관련해 진상 규명에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2024년까지 1945년 8월 당시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조선인 명부, 사고 뒤 희생자와 생존자 등 명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하지만 이후 후세 기자의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우키시마호가 실제 출항하기 직전과 직후 만들어진 명부 19종이 확인됐다. 이어 일본 정부는 한·일 우호 관계가 이어지던 2024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우키시마호 승선자 관련 자료 75건을 외교부에 전달했으며,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이를 분석해왔다.

하지만 우키시마호 참사와 관련해 조선인 귀국선의 출항 경위, 선박 침몰 직전 일본 해군의 탈출 여부, 구조 상황과 생존자 수, 선체 인양과 희생자 수습 과정에 대한 진상 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후세 기자는 “후생노동성에 우키시마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줄 관련 문서가 승선자 명부 외에도 600개 이상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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