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거 합법적 행위에 사후 책임 묻는 ‘소급 입법’, 법치주의 토대 흔든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저서 ‘자유의 헌정’에서 법치주의의 본질을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예측 가능한 규칙’이라 보았다. 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국가의 공권력을 예측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돕는 이정표여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법치주의도 신뢰보호의 원칙을 근간으로 삼는다. 국민이 법 제도의 지속성을 믿고 형성한 생활 관계는 국가가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소중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입법과 행정에서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소급(遡及)’이라는 방식을 고려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어 우려를 낳는다.
현대 시장경제는 법치주의가 담보하는 ‘예측 가능성’이라는 사회적 자본 위에서 작동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더글러스 노스는 국가 경제의 성패가 ‘재산권을 보호하고 계약 이행을 보장하는 제도적 안정성’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법 제도가 너무 자주 바뀌거나, 과거에 합법적으로 이뤄진 행위에 대해 사후적으로 책임을 묻는 소급 입법이 논의된다면 그 기반이 흔들리게 된다. 경제 주체들이 경영이나 투자 리스크를 넘어 ‘법적 불확실성’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은 결국 시장 전반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국회에서 심의 중인 집단소송법 제정안은 이러한 맥락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소비자 구제 강화와 기업 책임 경영을 유도하려는 입법 취지에는 공감한다. 다만, 법 개정 전에 발생한 사유에 대해서까지 소급하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은 보다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기업이 과거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예측하고 대비해 온 경영 환경을 사후적으로 변경하는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도가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비소급 원칙을 지키면서, 경제 주체들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부여하는 입법적 지혜가 발휘돼야 한다.
부동산 정책에서도 국민의 신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최근 일부 국회의원이 발의한 1주택자 양도소득세 장기보유특별공제 폐지안은 현행법의 장려책을 믿고 오랜 시간 주거 계획을 세워온 실거주자들에게 혼란과 불확실성을 안긴다. 국가 정책 방향에 따라 성실하게 거주를 이어온 이들이 사후적 제도 변경으로 예기치 못한 부담을 지게 된다면, 향후 국가의 정책 시그널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유지하기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정책의 단기적 효용성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국민과의 약속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한다.
금융감독원이 소멸시효가 완성된 일부 보험금에 대해 소급 지급을 추진하는 논의 역시 사법 시스템 원칙과의 조화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소멸시효 제도는 법적 평온을 유지하고 권리 관계를 조기에 확정해 사회적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장치다. 계약자 보호라는 공익적 가치는 존중되어야 할 지향점이지만, 이미 법적으로 확정된 사안을 행정적 권고로 뒤집는 행위가 반복된다면 사적 자치의 근간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행정은 사법 질서와 선순환을 이룰 때 비로소 그 정당성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소비자 보호나 부동산 시장 안정과 같은 정책적 지향점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담긴 정책일수록 그 수단과 절차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신뢰보호의 틀 안에서 정교하게 설계돼야 한다. 원칙을 지키는 정당성이 확보될 때 정책의 온기도 시장 전체에 따뜻하게 퍼져나갈 수 있다. 법이 원칙을 지킬 때 경제의 역동성도 살아난다. 우리 사회가 성숙한 시장경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눈앞의 성과를 위한 단기적인 처방보다, 법적 안정성과 신뢰보호라는 가치를 우선시해야 한다. 정책 완성도는 국민과의 두터운 신뢰 위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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