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쟁 청구서, 빈국이 먼저 받았다

정유진 기자 2026. 4. 2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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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미니버스 운전노조원들이 21일 마닐라 케손시티에서 유가 급등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인해 개발도상국의 약자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 EPA연합뉴스

남반구 국가들 ‘에너지 대위기’
휴교·운송 파업 등 피해 극심
미국인 절반은 정세 관심 없어
강달러 영향으로 타격 적은 탓

미국인의 절반은 대이란 전쟁에 대해 ‘조금’ 들어봤거나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답한 반면 남아시아·아프리카·중동 등 이른바 ‘남반구’ 국가에선 약 90%가 이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벌인 전쟁인데도 정작 미국인보다 다른 국가 사람들이 더 직접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난한 나라일수록 전쟁의 대가를 더 많이 치르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포린폴리시는 20일(현지시간) 미국인 10명 중 6명은 이란 전쟁을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분노가 크게 표출되지 않는 이유로 국제 정세에 대한 낮은 관심과 상대적으로 작은 경제적 타격을 꼽았다.

최근 10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입소스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임에도 미국인 응답자의 44%는 전쟁에 대해 ‘조금’ 들어봤다고 답했다. 6%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6명은 가장 우려하는 국내 문제로 이란 전쟁 등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의료 접근권’을 꼽았다.

반면 지오폴이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케냐·나이지리아·남아프리카공화국의 37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89%가 이란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답했고 ‘조금’ 들어봤다는 사람은 11%에 불과했다. 들어본 적 없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0명 중 7명은 이란 전쟁으로 인한 생활물가 상승을 ‘매우 우려한다’고 했다.

이 차이는 미국의 전쟁이지만 그 비용을 가난한 국가 사람들이 더 많이 치르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포린폴리시는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국이고, 인공지능(AI) 산업 호황으로 주식시장이 활황인 데다, 강달러의 혜택 등으로 경제 여건이 좋은 상황에서 전쟁이 시작됐다”며 “반면 남반구 국가 대다수는 에너지 순수입국인 데다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할 재정 여력이 부족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종전 협상 중재국으로 나선 파키스탄은 에너지의 80%를 걸프 지역에서 수입한다. 파키스탄은 에너지난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하고, 내각 각료에게 두 달치 급여 지급도 중단했다. 공무원 절반이 교통비를 줄이기 위해 재택근무를 하고, 학교도 2주간 휴교에 들어갔다.

에너지의 95%를 수입에 의존하는 방글라데시는 취사용 연료로 쓰이는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이 50% 이상 급등하며 하루 4달러를 받는 봉제공장 노동자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네팔도 연료 가격 상승으로 운송 파업이 일어나 쌀과 채소 가격 등이 연쇄 폭등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의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필리핀은 지난 3월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베트남은 항공 노선 감축을 지시했다. 전력의 90%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계속되는 정전으로 기업 활동이 마비됐다. 일부 지역에선 하루 12시간씩 전력 공급이 끊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린폴리시는 “통화 가치가 약한 국가일수록 전쟁 비용을 더 많이 치르는 반면, 부유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피해를 덜 받고 있다”면서 “미국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호르무즈 해협 봉쇄 기간이 길어질수록 미국인이 겪을 고통은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 | 정유진 특파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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