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낯 뜨거운 아부가 미덕이 된 세상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2026. 4. 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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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정치 지도자를 성인에 비유하며 아부하는 건
거의 없었던 일이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노멀’한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처럼 ‘뉴노멀’한 상황을 가능케 한 게 윤석열이란 ‘거악’이다
윤석열과 비교되면 그 누구건 선하고
정의로운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마법,
지금 우린 그런 마법 체제 속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권력자에 대한 아부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는 아부가 전성시대가 아닌 적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엔 일반 대중이 아부를 직접 목격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부가 워낙 은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아부의 실상이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면 아부를 한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대놓고 경멸할 수는 없었다. 아부의 성공으로 이전보다 더 강한 권력을 누리게 된 아부꾼을 누가 감히 공개적으로 경멸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뒤에서 수군거리며 흉을 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아부꾼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건 분명하다. 아부는 부끄러운 짓이라는 공감대는 폭넓게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소셜미디어·유튜브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혁명이 모든 걸 완전히 바꿔놓고 말았다. 이름 없는 보통사람들이 모여 권력집단을 형성하는 게 한결 수월해지고 그걸 사업 모델로 확장시킨 ‘정치군수업자들’이 주도하는 강성 팬덤이 실세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이는 여야,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정치판 전체에 걸쳐 작동하는 법칙이 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정치는 일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일반 유권자들의 다수는 워낙 먹고살기 바빠 정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참여는 투표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투표의 대상이 된 정치상품을 제조하고 유통시키는 주체는 시간·돈·열정이라는 3요소를 갖춘 팬덤이다.

아부에 서투른 사람도 아부를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렸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추종하는 권력자에 비판적인 사람이나 세력에 대한 공격이다. 즉, 그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혐오 선동의 행동대원으로 나서는 것인데, 이는 권력자뿐만 아니라 권력자를 추종하는 팬덤의 눈에 드는 일거양득의 아부가 된다. 팬덤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은 반대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에 대한 증오·혐오이기 때문이다. 팬덤을 조직하거나 팬덤에 기생하는 정치군수업자들은 증오·혐오를 팔아먹는 상인이지만, 증오·혐오에 화려한 포장을 씌워 팬덤의 삶에 의미를 주면서 도덕적 확신으로 열광하게 만드는 주술사이기도 하다.

아부가 낳은 ‘도덕적 면허’란 비극

이제 권력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정치권력은 팬덤권력을 필요로 하지만, 팬덤권력 역시 정치권력을 필요로 한다. 무소속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팬덤권력을 본 적이 있는가? 팬덤은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고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강력한 권력감정을 필요로 한다. 이게 바로 팬덤이 거대 양당 체제에 집중돼 있는 이유다.

한국처럼 연줄에 죽고 사는 사회에선 권력감정은 이념과 이익이라는 두 영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정치권력과 팬덤권력은 이익공동체로서의 공생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끈끈한 아부를 주고받는다. 자기 부족만이 선하고 정의롭다는 도덕적 확신이 있다면 역겨울 정도로 심한 아부를 해도 괜찮다.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이용해 고급 일자리를 얻으려는 구직자들 사이에선 권력자의 호감을 얻기 위한 ‘아부 배틀’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지지자들에게 아부해 자기 진영의 정상에 오른 권력자는 아부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그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낯 뜨거운 아부가 난무해도 웃거나 경멸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우리는 낯 뜨거운 아부가 미덕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미국 언론인 헨리 루이 멩켄은 1920년대 미국 정치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현재 미국 정치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공직자가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대중에게 아부하고 빌붙는 것이다. 공직 후보자는 대중의 광기를 통째로 수용해야만 한다.” 이건 100여년 전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진 않다. 정치인이 대중을 다루는 방법이 과학의 도움을 받아 교묘하고 세련돼졌다는 변화는 있었을망정 대중에 대한 아부는 건재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10년 넘게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팁 오닐은 “돈은 정치의 젖줄이다”라고 단언했다. 정치인들은 표 이전에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대중에게 아부를 해야 한다. 미국에서 2001년 출간된 <선거 캠페인의 CEO, 정치 컨설턴트>라는 책에 따르면, 정치인이 기부자들에게 하는 전형적인 아부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귀하께서는 최고 수준의 애국심과 헌신성, 인품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나라가 올바른 길을 선택하느냐 여부는 선생님 같은 똑똑하고, 헌신적이며, 의식이 깨어 있는 국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기부를 해줄 잠재적 고객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게끔 추켜세우는 걸 나무랄 수는 없지만, 문제는 지지자들을 향한 모든 정치 담론이 이런 아부 일색이라는 데에 있다. 장기간에 걸쳐 ‘세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런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접한 지지자들은 실제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바로 여기서 ‘도덕적 면허 효과(moral licensing effect)’라는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이 이론의 핵심은 사람이 선행이나 도덕적 행동을 하면, 도덕성에 대한 자기 이미지가 강해지는데, 이런 긍정적 자기 이미지는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미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나쁜 일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라는 ‘도덕적 면허’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에게 법과 윤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전적 공격성을 보이며, 심지어 잔인한 행동에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강성 지지자들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상대로 한 싸움을 잘할 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정치인들에게 후원금도 많이 보낸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이들의 눈에 들기 위한 경쟁을 하며, 이런 경쟁이 현재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권력자에게 아부를 하거나 반대편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더라도 지지자들, 특히 강성 지지자들이 볼 수 있게끔 공개적으로, 도발적으로 하는 게 기본적인 정치 문법이 돼버리고 말았다.

아부와 증오에 능한 일부 의원들이 보좌진을 동원해 국회에서 싸우는 장면을 유튜브의 짧은 동영상인 ‘쇼츠’로 제작, 자기 홍보용으로 쓰는 게 유행이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강성 지지층이 이런 쇼츠를 보고 열광하니까 더 과격하게, 아니 무자비하게 싸워야 한다. 강성 정치인들은 낯 뜨거운 아부와 더불어 후안무치한 쇼츠 제작을 잘해 지지자들의 지지와 돈을 많이 끌어내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방선거 공천이 강성 당원의 축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윤석열’ 아닌 한 다 옳다는 세상

강성 지지자들이 신봉하는 제1의 정치적 원칙은 ‘닥치고 공격(닥공)’이다. 최근 레오 14세 교황은 “민주주의는 도덕적 기반이 없으면 다수의 폭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만, 닥공이 지배하는 정치체제하에선 ‘도덕’은 무용지물이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대역죄인’ 윤석열이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다. 윤석열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분노가 정치를 대체하고 말았다.

8년 전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준수가 ‘독재’의 새로운 판별 기준이라고 했을 때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감을 파괴한 게 바로 윤석열의 계엄 선포와 국민의힘의 ‘윤어게인’이다. 계엄과 ‘윤어게인’이 아닌 한 그 어떤 정치적 행위도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미화되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런 세상을 마땅치 않게 여긴 중도파가 많았지만, 이들을 침묵하게 만든 건 ‘윤어게인’ 세력의 상대적 ‘사악함’ 또는 ‘무지몽매’다. 인간은 ‘비교하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민주화 이후 정치 지도자를 성인(聖人)에 비유하면서 아부하는 건 거의 없었던 일이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런 비유가 이미 여러 번 등장했다. 그런 아부를 한 사람이 공직에 중용되는 보상이 이루어진 것도 여러 번이다. 이래도 되나? ‘노멀’한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처럼 ‘뉴노멀’한 상황을 가능케 한 존재가 바로 윤석열이라는 ‘거악’이다. 윤석열과의 비교가 이루어지는 한 그 누구건 선하고 정의로운 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마법, 지금 우리는 그런 마법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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