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통합, 방향은 나왔지만 실행이 없는 정책은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는다
영유아기는 인간 발달의 기초가 형성되는 결정적 시기다. 이 시기의 경험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뇌 구조와 정서 체계, 관계 형성의 기반을 만들어낸다. 학계와 영유아교육 현장에서는 초기 환경의 질, 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인과의 상호작용이 뇌 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강조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영유아 정책은 이 기본 원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발표한 영유아 사교육 대응 방안은 취지 자체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제시된 이음교육 확대, 독서교육 강화, 방과후 프로그램 활성화 등의 정책은 과연 영유아 발달의 본질에 부합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개별 정책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책을 통합하고 방향을 잡아야 할 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 책임 없는 구조가 현장을 흔들고 있다
현재 영유아 교육·보육 체계는 이미 통합을 전제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보육 업무는 교육부로 이관되었고, 유보통합은 국가 정책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누가 책임지고 무엇을 추진하는지 불명확하다. 교육부는 방향을 제시하지만 실행은 지역에 맡겨져 있고, 교육청은 일부 사업을 선택적으로 시행할 뿐 전체 구조를 책임지는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정책은 일관된 체계 없이 단편적으로 등장한다.
교사 대 아동 비율 개선은 시범사업에 머물고, 보육‧교육을 지원하는 전담인력 배치는 일부 지역에 국한되며, 교육과정은 현장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는 여전히 과도한 업무에 묶여 있고, 아이들은 안정적인 상호작용 대신 프로그램 중심의 교육에 노출되고 있다. 결국 지금의 문제는 정책의 부족이 아니라 책임 구조의 부재에서 비롯된 구조적 실패다.
◇ 경쟁이 강화되는 구조에서 '방치'는 더 큰 위험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현재 영유아 교육·보육 현장은 점점 더 경쟁이 강화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충원율과 선택을 둘러싼 압박 속에서 기관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생존을 위해 부모의 요구와 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경쟁이 영유아 발달의 원리에 기반해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충분한 상호작용과 놀이 중심 경험을 보장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프로그램 중심의 운영으로 흐르기 쉽다. 독서 강화, 특별활동 확대, 조기교육 성격의 프로그램이 강화되는 것도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책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방치된다면, 경쟁은 더욱 왜곡된 형태로 심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기관 간 격차는 확대되고, 교육·보육의 질은 불안정해지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경쟁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적 기준과 책임 있는 정책을 통해 경쟁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실행 구조'다
유보통합을 둘러싼 논의는 종종 속도의 문제로 환원된다. 빨리 추진할 것인가, 시간을 두고 갈 것인가.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실행 구조의 확립이다. 유보통합은 단순한 제도 통합이 아니다. 교사 대 아동 비율, 인력 구조, 재정 지원, 교육과정 운영 등 모든 요소가 맞물린 복합적 변화다. 이 변화는 구체적 실행 계획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특히 교사 대 아동 비율 개선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비율이 낮아지면 교사 인건비의 비중은 증가하고, 운영 구조는 달라지며, 재정 투입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여기에 행정·보육지원·대체 인력과 같은 전담인력 배치가 함께 이루어져야 비로소 교사가 아이와의 상호작용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즉, 유보통합은 "기준 강화 → 재정 투입 → 운영 구조 변화"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정책이다.
◇ 민간과 사립이 공공적 기준을 적용하면서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유보통합 과정에서 또 하나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민간·가정·사립기관은 통합의 대상이지 배제의 대상이 아니다. 현재 구조에서 이들을 제외한 채 공공 중심 체계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민간의 소멸을 기다리는 정책이 아니라, 민간이 공공적 기준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다. 공공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운영이 유지될 수 있도록 교사 인건비와 운영비를 포함한 재정·운영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합은 곧 현장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어린이집 감소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감소가 공공성 강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공백을 메울 체계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축소는 곧 돌봄 공백과 질 저하로 이어진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공공성이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방치는 아이들의 발달 환경을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 이제는 '실행 로드맵'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실행 로드맵이다. 단순한 계획이나 방향 제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요소가 명확히 포함된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가 없는 로드맵은 정책이 아니라 선언에 불과하다.
• 관리 체계 일원화를 통한 명확한 책임 구조
• 연차별로 무엇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실행 계획
• 교사 대 아동 비율 개선과 지원 전담인력 배치를 포함한 인력 정책
• 0~5세 교육과정 운영 원칙을 발달권 중심으로 재정립
• 이를 뒷받침할 재정 투입 계획
◇ 교육부와 교육청은 답해야 한다
아이들의 시간은 정책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현장의 교사와 기관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은 유보통합의 책임 주체, 연차별 실행 계획, 재정 투입 방안을 포함한 구체적 실행 로드맵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로드맵은 아이들의 발달권을 중심에 두고, 교사가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며, 모든 기관이 함께 공공적 기준 아래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유보통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과제다. 문제는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책이 아니라, 책임 있게 실행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영명은 영유아교육·보육 현장과 학계를 오가며 30년 가까이 연구와 실천을 이어온 아동 보육·교육 전문가다. 국공립 어린이집 원장을 비롯해 중앙보육정보센터, 인천광역시 보육정보센터 센터장을 역임하며 정책과 현장을 두루 경험했다. 현재 영유아 권리 존중 단체 '아이들이행복한세상'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베이비뉴스 칼럼을 통해 아이의 일상과 권리를 중심에 둔 보육·교육 정책과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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