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돈으로는 살 수 없어”…연봉 5400만원 미국 직장인이 선택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남윤정 AX콘텐츠랩 기자 2026. 4. 2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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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의료비와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한 미국인들이 원격근무를 무기로 해외로 탈출하고 있다. 고국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한 생활비를 찾아 떠나는 ‘디지털 노마드’의 엑소더스가 가속화되면서, 미국 복귀 비용이 너무 높아 돌아오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9일(현지시간) 치솟는 생활비를 피해 원격근무를 유지하며 해외로 거점을 옮기는 미국인 ‘디지털 노마드’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에게 해외 이주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경제적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란 노트북·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특정 사무실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 어디서든 원격으로 일하며 이동하는 생활 방식을 가리킨다. 프리랜서, 스타트업 종사자, 원격근무 직장인이 주를 이루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원격근무가 보편화되면서 급속히 확산됐다.

물가가 저렴한 동남아시아나 남유럽이 주요 거점으로, 태국 치앙마이·발리·포르투갈 리스본 등이 대표적인 노마드 허브로 꼽힌다.

3년째 노마드 생활 중인 비디오 에디터 코리 오플래너건(43)은 동남아시아와 남유럽을 오가며 연간 7만 달러(약 9700만 원)를 쓴다. 그는 같은 생활 수준을 고향인 덴버에서 유지하려면 최소 12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추산한다. 덴버는 미국 내 생활비 비싼 도시 13위로, 주택 임대비가 전국 평균보다 31%나 높다.

실제로 미국 4인 가족의 연평균 필수 생활비는 10만 6903달러에 달하는 반면, 전국 가계 중위소득은 7만 8171달러에 불과해 많은 가구가 적자 살림을 면치 못하는 구조다.

오플래너건이 해외를 고집하는 결정적 이유는 의료비다. 그는 최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부부 함께 혈액 검사·초음파·1시간 이상의 의사 상담이 포함된 정밀 건강검진을 받았다. 1인당 비용은 400달러였다. 미국이었다면 수천 달러가 들었을 항목이다. 그는 “미국 의료 시스템이 두렵다”며 “지금은 해외에서 은퇴하되, 일 년에 몇 달만 귀국해 가족을 보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오플래너건의 사례만이 아니다. 조지아 트빌리시에 거주하는 트렌티넬라 씨는 연봉 4만 달러(약 5400만 원) 미만으로 미국 기준으로는 평범한 수입이지만, 현지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주 2회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고 거의 매일 택시를 이용하며 외식을 즐기는 것은 물론, 6개월 유급 출산휴가에 요리사 지원까지 받았다. 그녀는 “미국 대기업 친구들도 누리지 못하는 혜택”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엑소더스의 배경으로 팬데믹발 원격근무 확산과 2024년 대선 이후의 정치적 불안, 장기화된 고물가를 꼽는다. 해외 거주 미국인 협회(AARO)에 따르면 현재 약 550만 명의 미국인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2025년 1분기 기준 미국 노동통계국(BLS)은 전국 근로자 중위 연소득을 6만 2,088달러로 집계했다.

임금은 오르지만 2020년 1월 대비 2023년 말 미국의 전체 물가는 19%, 식품은 25%, 주거비는 21% 급등하며 실질 구매력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생활비 절감의 달콤함 뒤에는 재무적 함정도 도사린다. 자산관리 전문가 피터 셍겔만은 “해외 근로소득 공제를 통해 미국 세금을 전혀 내지 않으면, 과세 소득 자체가 없어져 개인퇴직계좌(IRA)나 로스 IRA에 납입 자격을 잃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노마드가 많다”고 경고한다. 체류 국가의 지방세·연금 납부 의무를 간과했다가 나중에 세금 폭탄을 맞는 사례도 적지 않다.

미국을 떠난 이들이 직면한 역설은 뚜렷하다. 귀국을 원하는 노마드들은 “복귀 비용이 너무 높다”며 선뜻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다. 저렴한 삶을 찾아 떠난 끝에 정작 고향이 가장 돌아가기 어려운 나라가 돼버린 셈이다.


남윤정 AX콘텐츠랩 기자 yjna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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