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파리서 안동까지…한옥에 깃든 90일, 프랑스 작가가 만난 '한국의 시간'
(안동·서울=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도시, 전통 한옥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제작진이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한 것은 지난 3월. 낙동강이 굽이치는 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을 한옥 안에 서양식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 아래, 프랑스 현대미술 작가 프레데릭 르글리즈는 인물 초상화를 그리고, 티모테 블랑댕은 디지털 이미지 위에 아크릴을 덧입히며 새로운 풍경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락고재문화재단과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번 프로젝트는 '삶 속에서 경험하는 예술'을 목표로 했다.
◇ "왜 신발을 벗나요?"…생활부터 바뀐 창작 방식
두 작가의 한옥에서의 하루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됐다.
"왜 신발을 벗나요?"
작가들에게 한국의 생활 방식은 낯설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계기였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그림을 시작하는 일상이 시작됐다.
이러한 변화는 습관을 넘어 창작의 태도까지 바꿨다. 바닥에 앉는 생활, 공간과 몸의 거리, 그리고 느린 호흡은 작업의 리듬 자체를 달라지게 했다.
두 작가는 약 3개월 동안 하회마을 락고재 한옥호텔에 머물며 창작에 몰두했다.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로 향하고, 하루 대부분을 그림에 집중한 뒤 해 질 무렵 한옥으로 돌아오는 생활이다. 이 반복은 오히려 창작의 밀도를 극대화했다.
도시에서의 빠른 속도 대신, 이곳에서는 '느림'이 창작의 조건이 됐다.
◇ 한옥이 만든 변화…"단순함이 예술을 바꾼다"
두 작가에게 한옥은 작업의 일부였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낸 구조, 자연과 맞닿은 공간,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특히 블랑댕은 디지털 이미지와 아크릴을 결합한 작업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겹치는 풍경을 만들었고, 르글리즈는 인물 초상을 통해 한국에서 느낀 정서를 담아냈다.
이 과정에서 '덜어내기'와 '집중'이라는 한국적 미학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었다.
◇ "길 위에서 이어진 예술"…마을 전체가 작업실
작업은 화실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한옥과 작업실을 오가는 길, 마을의 골목, 강가와 숲은 모두 창작의 일부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조차 놓칠 수 없다"는 블랑댕의 말처럼, 일상의 이동 자체가 예술적 경험이 됐다.
이들은 매일 마을을 걸으며 빛과 색, 자연의 변화를 관찰했고, 그 경험은 고스란히 작품으로 이어졌다.
이번 레지던시는 락고재문화재단과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화과가 MOU를 통해 추진한 공식 국제 협력 프로그램이다. 매년 프랑스 작가 2명을 초청해 한국 전통 공간에서 창작 활동을 지원할 예정이다.
프랑스대사관 측은 "아티스트 레지던시는 프랑스 예술가가 한국의 문화유산과 생활 방식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협력 수단"이라며 "수교 140주년을 맞아 프로그램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 한옥에서 시작된 예술…서울에서 이어지다
두 작가의 90일은 전시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완성한 작품은 주한 프랑스대사관과 서울의 전시 공간에서 공개됐다. 관람객들은 프랑스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한국의 빛과 색, 그리고 한옥의 정서를 마주하게 된다.
두 작가에게 하회마을에서의 시간은 체류의 경험만이 아니었다.
"한국과 한옥에서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겠다"는 르글리즈의 말처럼, 이 경험은 작품을 넘어 삶의 일부로 남았다.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마을에서 보낸 90일의 시간은 캔버스 위에 남았고, 다시 또 다른 문화로 이어졌다.
<내레이션 : 유세진, 구성 : 민지애, 영상 : 박소라·김정민, 취재협조 : 주한 프랑스 대사관·락고재 문화재단, 연출 : 이명선>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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