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 위에서 시작된 도전, 대한민국 화학 산업 뿌리 되다 [과학의날 특집]
수입 의존하던 농약·합성수지 국산화
폴리부텐 국산화, 외화 절감·경쟁력 확보
독자 신물질 영국에 2100만달러 수출
세계 최초 폴리이미드 단일 공정 개발
세계 최초 화학분자 교환법 개발 쾌거
기술 수입국, 수출국으로 전환시킨 주역

[충청투데이 조정민 기자] 외국 기술에 의존하던 산업 초기 '화학 기술로 스스로 먹고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출발한 한국화학연구원은 지난 50년간 수입 대체에서 기술 수출, 그리고 미래 산업 창출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화학기술 발전의 궤적을 이끌어 왔다.
◆ 논밭 위에서 시작된 도전, 산업과 함께 성장하다
1976년 9월 2일, 서울 동숭동의 한 임시 사무소에서 한국화학연구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책상 몇 개와 18명의 연구자가 전부였던 작은 조직은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화학 기술 자립'이라는 목표를 품고 있었다. 전후 복구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 농약과 합성수지조차 외국 기술에 의존하던 현실 속에서 이들의 도전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이듬해 연구소는 충남 대덕의 논밭을 매입해 본격적인 터전을 마련했다. 1978년 세 동의 연구동이 완공되면서 연구원들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왔고 주변에는 논과 밭, 소 떼뿐이었지만 이곳은 훗날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중심이 되는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성장하게 된다. 초기 연구자들은 연구비 확보조차 쉽지 않았다. 기업을 찾아다니며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해야 했고 "머리 팔러 왔습니다"라는 말이 "가발 장사냐"는 되물음으로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산업 현장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사명감으로 연구를 이어갔다. 주목할 점은 설립 과정에서 민간의 역할이다. 한국종합화학, 럭키(현 LG화학), 쌍용, 호남화학 등 136개 기업이 총 38억 원을 출연하며 연구소 설립을 지원했다. 이는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산업계가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은 화학연이 설립 초기부터 산업과 긴밀히 연결된 연구를 수행하는 '현장 밀착형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는 기반이 됐다.
◆ 수입 대체에서 기술 수출까지… 산업 지형을 바꾼 성과
화학연의 연구 성과는 곧 대한민국 화학산업의 성장 과정과 맞닿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폴리부텐 국산화다. 1980년대 초반까지 접착제와 윤활유의 핵심 원료였던 폴리부텐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며 연간 800만 달러의 외화를 지출해야 했다. 화학연은 1984년부터 기업과 공동 연구에 나서 1986년 시제품 생산에 성공했고, 이후 산업화까지 이어지며 수입 의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 기술은 이후 DL케미칼로 이전돼 대규모 생산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며 대한민국 정밀화학 산업의 핵심 기반이 됐다. 단순한 수입 대체를 넘어 수출 산업으로 전환된 상징적인 사례다. 1990년대에는 기술 개발 방향이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됐다. 물질특허제도 도입으로 기존 방식이 막히자 화학연은 오히려 독자 신물질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세계 최초로 개발된 퀴놀론계 항생제 후보물질이 1993년 영국 제약사에 2100만 달러에 기술 이전되며 국내 기술 수출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는 대한민국이 기술 수입국에서 기술 수출국으로 도약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화학연의 성과는 산업을 넘어 국민의 일상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자동차 엔진 보호 첨가제 '불스파워'는 기존 제품의 환경 문제를 개선하면서 연료 절감과 소음 감소 효과를 동시에 구현해 세계 30여 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또 다른 대표 성과인 '옥시크린'은 염소계 표백제의 단점을 극복한 산소계 표백제로 국내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며 친환경 생활용품 시장을 선도했다. 이 제품은 미국 환경 인증을 획득하며 품질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표백제 시장을 국산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고기능성 폴리이미드 소재 개발은 첨단 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세계 최초 단일 공정으로 개발된 이 소재는 유연 디스플레이와 전자기기 핵심 부품으로 활용되며 국내 소재 산업의 자립을 이끌었다. 이는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화학연 기술이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미래 산업을 향한 도약, 다음 50년의 전략
창립 50주년을 맞은 화학연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연구의 중심은 에너지, 환경, 첨단소재 등 미래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특히 차세대 태양전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화학연은 페로브스카이트 태양전지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효율을 달성하며 국제 학술지 Nature와 Science에 연구 성과를 동시에 발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글로벌 연구 경쟁력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다. 특히 연구진이 개발한 '화학분자 교환법'은 서로 다른 분자가 순간적으로 교환되는 원리를 활용한 세계 최초의 공정 기술로, 대면적 태양전지 제작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기술은 향후 태양광 산업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으며 현재 상용화를 향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화학연은 앞으로도 공공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기반으로 연구 성과가 산업과 국민 삶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기초 연구부터 산업화,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이어지는 전주기 연구 체계를 통해 미래 산업을 선도하는 것이 목표다. 50년 전, 연구비를 구하기 위해 기업 문을 두드리던 연구자들의 도전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대덕의 논밭 위에서 시작된 작은 연구소는 대한민국 화학산업의 뿌리가 되었고, 그 뿌리는 이제 글로벌 혁신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국화학연구원의 다음 50년은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지속가능한 산업과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는 화학 기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조정민 기자 jeongmin@cctoday.co.kr
*본 기사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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