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의 질주, 그 뒤에 숨은 세 가지 설계 철학 [이승현의 AI 네이티브]

앤트로픽(Anthropic)의 클로드(Claude)가 점점 판을 바꾸고 있다. 2024년 1월 약 87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앤트로픽의 연간 매출 런레이트는 2025년 말 90억 달러를 거쳐, 2026년 4월 기준 300억 달러를 돌파했다. 2월(140억) → 3월(190억) → 4월(300억)로 이어진 최근 8주간의 성장은 미국 기업사에서 이런 속도의 성장은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될 정도다. 같은 시점 오픈AI의 연 런레이트(약 250억 달러)를 추월했으며, 기업가치는 2026년 2월 시리즈 G 라운드에서 3800억 달러로 평가받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성장이 단순히 더 똑똑한 모델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최근 1년간 앤트로픽이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들, 클로드 코드(Claude Code), 에이전트 스킬(Agent Skills), 그리고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MCP)의 오픈 스탠다드화 등 은 경쟁사들과는 결이 다른 AI 설계 철학의 일관성을 드러낸다.
터미널로 내려간 에이전트, 클로드 코드의 의미
AI 코딩 도구 하면 대부분은 에디터 사이드바에 붙은 자동완성 위젯을 떠올린다. 깃허브 코파일럿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클로드 코드는 처음부터 다른 자리를 선택했다. 터미널이다. 개발자가 이미 수십 년간 사용해온 그 올드한 인터페이스에, 파일시스템과 셸 명령을 직접 조작할 수 있는 에이전트를 심어 넣은 것이다.
이 선택은 단순한 UI 결정이 아니라 "AI가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답변이다. 기본적으로 IDE 플러그인은 코드 작성 보조라는 틀을 벗어나기 어렵지만 터미널은 파일 조작, 테스트 실행, 빌드, 배포, 깃 연동, 스크립트 작성까지 개발 작업 전체가 교차한다. 여기에 들어간 에이전트는 '보조'가 아니라 직접 권한을 가지고 '작업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효과는 이미 수치로 드러난다. 앤트로픽 엔지니어링 조직 내부에서 클로드 코드는 전체 코드의 70%에서 90%를 작성하고 있으며, 구글 수석 엔지니어가 시애틀 밋업에서 "1년치 아키텍처 작업이 1시간 만에 재현됐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할 정도다.
더 주목할 지점은 비개발자로의 확산이다. 미국 헬스케어 IT 기업 에픽의 세스 하인은 "우리 회사 클로드 코드 사용의 절반 이상이 비개발자 직군"이라고 밝혔다. 지원팀, 구현팀 직원들이 터미널에 들어와 스스로 작업을 자동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코딩 도구'로 설계된 제품이 '범용 에이전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26년 1월 기준으로 보면, 클로드 코드는 단일 제품으로 약 25억 달러의 연간 런레이트를 기록 중이다.
스킬, 파일시스템이 된 메모리
클로드가 2025년 10월 발표하고 12월 오픈 스탠다드로 확장한 에이전트 스킬(Agent Skills)은 앤트로픽의 설계 철학을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스킬은 단순하다. 모델에게 특정 작업을 어떻게 수행할지 알려주는 마크다운 파일, 그리고 선택적으로 추가 문서와 사전 작성된 스크립트로 구성된 폴더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담긴 발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프로그레시브 디스클로저(Progressive Disclosure)라 불리는 이 구조는, 세션 시작 시점에 클로드가 설치된 모든 스킬의 이름과 설명만 시스템 프롬프트에 로드하고, 실제 작업이 해당 스킬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전체 내용을 읽어 들일 수 있는 방식이다. 잘 정리된 매뉴얼이 목차에서 시작해 특정 챕터로, 마지막으로 상세 부록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앤트로픽의 스킬은 필요한 정보만 필요한 시점에 로드한다.
자 생각해보자. 이 설계의 진짜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컨텍스트 윈도우의 한계를 돌파한다. 아무리 100만 토큰 컨텍스트를 제공해도, 모든 지식을 한꺼번에 밀어 넣으면 모델의 주의는 분산되고 비용은 치솟는다. 스킬은 파일시스템을 외부 메모리로 쓰자는 접근이다. 에이전트가 코드 실행 환경과 파일시스템을 가지면, 스킬에 담길 수 있는 컨텍스트의 양은 사실상 무제한이 된다. 최근 안드레이 카파시가 제시한 LLM 위키(LLM Wiki) 개념이나, 줄곧 필자가 주장하는 에이전트 센트릭 데이터(Agent-Centric Data) 논의와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둘째, 조직의 정보와 지식을 패키징 가능한 단위로 만든다. 앤트로픽은 2025년 12월 업데이트에서 에이전트 스킬(Agent Skills) 사양을 오픈 스탠다드로 공개하고, 캔바·노션·피그마·아틀라시안 등 파트너가 사전 제작한 스킬을 제공 AI 비즈니스하기 시작했다. 기업 관리자는 팀 및 엔터프라이즈 플랜에서 스킬을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다. 즉, 한 조직의 업무 표준·브랜드 가이드·컴플라이언스 규칙을 스킬 폴더로 문서화하면, 그 조직 전체의 모든 에이전트가 일관된 기준으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이든 조직이든 인공지능 전환(AX)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진전이다.
필자가 엔터프라이즈 AX 맥락에서 강조해온 메모리 해자(Memory Moat) 개념과 정확히 맞닿는다. 모델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조직만의 축적된 상태(프로세스, 판단 기준, 과거 맥락)는 복제 불가능한 경쟁력이다. 스킬은 이 해자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가장 간결한 방식 중 하나다.
오픈 스탠다드, 전략으로서의 개방
앤트로픽이 에이전트 스킬을 오픈 스탠다드로 공개한 결정은 이 회사의 전략적 DNA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2024년 MCP(Model Context Protocol)를 공개했을 때도 같은 패턴이었다. MCP는 에이전트 AI 산업의 사실상 표준 통신 프로토콜이 되었고, 2025년 말 프로젝트 통제권이 리눅스 재단으로 공식 이관됐다.
경쟁사들은 대체로 반대의 길을 택한다. 오픈AI의 GPTs,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 스튜디오는 기본적으로 자사 플랫폼 안에서 가치를 가두는 구조다. 반면 앤트로픽은 핵심 프로토콜을 개방하고, 그 위에서 실행 품질로 승부한다는 철학을 실현시키고 있다. 스킬은 설계상 다른 모델과도 함께 작동할 수 있어, 스킬 폴더를 코덱스(Codex) CLI나 제미나이(Gemini) CLI에 건네줘도 작동한다.
겉보기엔 자기 해자를 스스로 허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표준이 자사 철학에 맞게 정립되면, 그 표준에 가장 잘 최적화된 플레이어는 결국 그 표준의 설계자다. 과거 구글이 쿠버네티스(Kubernetes)로, 페이스북이 리액트(React)로 취했던 전략과 본질이 같다. 오픈AI·구글과의 경쟁에서 앤트로픽은 모델 성능 경쟁을 넘어서서발빠르게 에이전트 운영 체계 경쟁으로 전선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세 가지가 가리키는 한 방향
이 세가지가 의미하고 있는건 앤트로픽이 AI 경쟁의 무대를 "모델 안"에서 "모델 바깥"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업계의 문법은 단계적으로 이동해왔다. 처음엔 프리트레이닝이 전부였다. 더 많은 데이터, 더 큰 파라미터, 더 긴 컨텍스트 등 스케일링 법칙이 모든 걸 설명했다. 그다음 무대는 포스트트레이닝으로 옮겨갔다. RLHF, Constitutional AI, 추론 시간 컴퓨트 등 같은 베이스 모델에서 얼마나 더 뽑아내느냐의 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이 두 단계는 결국 모두 모델 안쪽의 경쟁이었다. 앤트로픽의 최근 움직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훈련으로 집어넣던 지식을 스킬 폴더로 외부화하고, 세션마다 휘발되던 맥락을 파일시스템에 영속화하며, 모델 간 연결을 프로토콜로 표준화한다. 지능을 모델 안에 더 압축해 넣는 대신, 환경에 분산 배치하는 설계다. 터미널이라는 작업 환경, 파일시스템이라는 기억 환경, 프로토콜이라는 연결 환경, 각기 다른 층위에서 같은 일을 한다.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경쟁 우위의 원천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모델은 다양한 방법으로 복제되고, 오픈소스가 상용을 빠르게 따라잡는 현실, 매 분기 아니 매달 새 프론티어가 이전 최고 성능을 갱신하는 패턴이 이를 증명한다. 파인튜닝 노하우조차 시간이 지나면 평준화된다. 그러나 한 조직이 축적한 스킬 라이브러리, 에이전트가 조작해온 파일시스템 구조, 팀이 만들어온 도구 연결망, 이런 것들은 복제되지 않는다. 단순한 훈련의 산물이 아니라 운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데이터 고갈이라고 하지만, 조직내에는 운영의 산물인 데이터가 그대로 있다. 그래서, 경쟁력은 "더 나은 모델"에서 "더 깊이 축적된 환경"으로 이동한다.
오픈 스탠다드 역시 이 맥락에서 비로소 이해된다. MCP와 에이전트 스킬을 개방한 것은 이타주의가 아니라 환경 그리고 표준을 지배하려는 베팅이다. 프리트레이닝 시대의 해자가 데이터와 컴퓨트였다면, 메모리 시대의 해자는 프로토콜과 축적된 상태다. 표준이 자리 잡으면 그 표준에 가장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플레이어는 결국 설계자다. 쿠버네티스, 리액트, 안드로이드, 쿠다가 걸어간 길을 앤트로픽이 에이전트 영역에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클로드 코드는 "AI가 어디서 일할 것인가", 스킬은 "AI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오픈 스탠다드는 "AI들이 어떤 규칙으로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셋을 합치면 하나의 거대한 청사진이 된다. 모델이 아니라 환경이 AI의 중심이 되는 시대, 그 환경의 설계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앤트로픽의 300억 달러 런레이트는 단순한 실적 수치를 넘어서서, 시장이 이 철학에 베팅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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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포티투마루 부사장은 스타트업 창업가 출신의 AI 전문가다.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인공지능플랫폼혁신국장으로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공공 AI의 초석을 닦았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린의 공공AX 고문을 겸하며 기술과 정책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론에 머물지 않는 현장형 전략가로서 국가 전반의 AI 네이티브 전환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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