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참을 수 없는 비밀> [김은정의 치매, 이야기](10)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2026. 4. 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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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기억할까.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지만,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중심에 남는다.

그 기억은 상처로 남아 그녀의 삶을 오래 붙잡고 있다.

이 기억은 내내 그녀의 삶을 지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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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기억에서 멈춰버린 현실이어도
새로운 삶 향한 의지 여전히 살아 있어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기억할까.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지만,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중심에 남는다. 박완서의 <참을 수 없는 비밀>에서 하영에게 그런 기억은 스무 살, 첫사랑 세준의 죽음이다. 그 기억은 상처로 남아 그녀의 삶을 오래 붙잡고 있다.

소설은 마흔 살의 하영이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는 하루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이번엔 달라. 달라져야 해"라고 다짐한다. 색종이 접듯이 생애를 반절 접어 스무 살, 마흔 살에 맞추어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렇게 도착한 강릉의 바다에서 하영은 한 청년의 시신을 마주한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채 죽어 있는 낯선 사람. 그 순간 그녀는 무너진다. 아무 관계도 없는 죽음 앞에서 하영은 왜 그렇게 절규했을까. 과거 스무 살의 하영은 물에 빠진 세준을 살리려고 인공호흡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그를 살리지 못했었다. 첫 키스가 죽음과 함께였다는 사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숨겨온 '참을 수 없는 비밀'이다.

이 기억은 내내 그녀의 삶을 지배해 왔다. 그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세준의 어머니가 남긴 "재수 없는 년"이라는 저주는 그녀 자신으로 하여금 늘 불행을 기다리는 생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스스로 작은 불행을 만들어내며 살아왔다. 그러면 더 큰 불행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강릉에서의 하루는 이러한 삶을 끊어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생각하는 이 '마흔' 살의 삶도 현실이 아니다. 소설 속의 장면들은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유 없이 이어지는 발걸음, 방향 없는 이동은 현실 속의 여행이라기보다 기억 속을 떠도는 행위에 가깝다.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녀가 믿고 있던 '마흔'은 실제가 아니라 기억 속에 고착된 시간이다. 강릉에서의 하루 역시 현실이 아니라 그녀의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였다.

하영은 저녁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두 번 울리고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전화드릴 테니 하실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생판 처음 들어보는 차갑고 기품있는 목소리다.

"뉘시유? 응. 당신 누구요? 누가 남의 집에……"

늙은 자기 목소리조차 잊은 치매 환자 하영은 의식 속 마흔 살의 세계를 만들고, 그로부터 과거와 작별하고자 했고, 그러다가 바닷가의 하얀 운동화의 시신은 어김없이 그녀를 다시 스무 살 기억으로 데려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마흔의 세계처럼 치매의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삶의 노력은 끝없이 시도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치매를 기억을 잃어 가는 병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하영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 속에 갇혀 있게 한다. 그래서 소설 속 하영은 계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도한다. 달라지고 싶다고,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끊임없이 다짐한다.

이렇게 치매인의 삶도 지속된다. 사라지는 기억처럼 삶의 의미마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삶을 이끌어가려는 의지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그렇게 치매 노인 하영도 "달라지고 싶다"는 마음만은 놓지 않는다. 많은 기억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그 의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해 준다.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