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가전, 낭비 줄일까? 주방에서 시작된 ‘탄소 절감' 실험
"엄마, 소고기 색깔 변했는데 그거 먹어도 되나?"
"냄새 맡아봐"
"엄마, 나 오이 있는데 또 샀어 뭐 해먹지?"

갓 결혼한 딸이 매일 친정 엄마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한다. 엄마는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 속 등장인물처럼 과거의 나를 찾아가 "반드시 AI 가전을 사야 한다"고 권한다. 일상적인 대화지만, 여기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집 안에서 반복되는 '낭비'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줄 모르고 식재료를 다시 산다.
최근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된 국내 한 기업 AI가전 광고 중 일부다. 이런 장면은 가전업체들이 최근 강조하는 변화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효율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적인 양면성 가진 인공지능 기술
인공지능 기술은 환경적인 면에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 증가나 냉각을 위한 수자원 사용 등 에너지 측면에서 새로운 환경 부담을 낳는 동시에, 기술을 활용한 에너지 효율 개선 등을 통해 자원 낭비를 줄이고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가전업계의 인공지능 경쟁은 단순한 자동화 수준을 넘어, 사용 패턴을 학습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사용자의 평소 패턴과 지금 현재의 요구사항을 분석하고 최적의 판단을 내려 맞춤 경험을 제공하는 가전이 속속 개발 중이다. 이런 변화는 집안일을 덜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중복 구매나 음식물 폐기, 불필요한 전력 사용처럼 일상 속 낭비를 함께 줄이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가정 내 에너지 소비의 상당 부분은 냉장·세탁·냉난방 등 가전에 집중돼 있다. 이 때문에 국내외 가전기업들은 AI를 활용한 사용 패턴 분석과 자동 제어 기술을 통해 불필요한 전력 소비를 줄이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스마트 가전과 수요관리 기술을 결합해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구조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등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수요관리(Demand Response)가 에너지 효율 개선의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편의성 높이는 AI가전...환경 영향도 줄인다
국내 기업 사례를 보면, 삼성전자는 최근 '빅스비(Bixby)'를 AI 가전에 적용했다.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 기능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빅스비는 대규모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일상적인 대화로도 사용자의 의도에 반응할 수 있게 고도화됐다. 생성형 AI 서비스 퍼플렉시티(Perplexity)와 결합해 일반적인 대화에도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과거 제품들은 특정 기능명이나 정해진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 제품들은 대화체로 말해도 의도에 맞는 답을 제공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패밀리 허브에 소고기랑 고등어 넣었으니까 모드를 바꿔줘"라고 말하면 냉장고가 이를 인식해 '육류/생선 모드'를 자동 설정한다. 또 "위스키 마실 거니까 얼음 만들어줘"와 같은 일상적인 표현에도 기능이 연동된다. 이러한 음성 기반 제어 기능은 냉장고뿐 아니라 세탁기, 에어컨, 청소기 등 다양한 가전에 적용되며 기기 간 연동성과 사용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LG전자 역시 AI 기반 가전에서 에너지 절감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탁기와 건조기 제품군에서는 의류의 무게와 오염도를 분석해 세탁 시간과 물 사용량을 자동으로 조절하고, 에어컨은 실내 환경과 사용 패턴을 학습해 불필요한 냉방을 줄이는 방식이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주요 가전업체들은 스마트홈 플랫폼을 통해 가전제품을 전력망과 연동하고, 전력 수요가 높은 시간대를 피해 자동으로 작동 시간을 조정하는 기능 등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폐기물·탄소배출 줄이는 '똑똑한 가전' 시대
다만 AI 기술 자체가 추가적인 전력 소비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환경적 효과를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운영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전력이 소모된다는 점은 기술의 환경적 비용으로 지적된다. 클라우드 기반 서비스나 데이터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사용량 역시 만만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기능 고도화가 제품의 에너지 효율 개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환경적 효과에 대한 기대도 함께 제기된다. 전력 효율화 등이 가능해지면서 폐기물이나 탄소배출, 자원사용 역시 효율적으로 이뤄진다는 취지다.
일례로 2026년형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 냉장고는 내부 카메라를 통해 식재료의 입출고를 실시간으로 인식하는 'AI 비전' 기능을 갖췄다. 이 냉장고는 신선식품이나 가공식품뿐 아니라 용기의 라벨까지 인식해 '푸드리스트'에 자동 저장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가 어디서든 현재 보관 중인 식재료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냉장고 내부 카메라를 통해 식재료를 인식하는 'AI 비전(AI Vision)' 기능에는 제미나이를 결합했다. 이를 통해 식품 인식 성능이 높아졌다. 예전에는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거나 뺄 때 자동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식품이 신선식품 37종, 가공·포장 식품은 50종까지로 제한됐으나 제미나이가 도입 후 인식 가능한 대상이 많아졌다. 사용자가 용기에 라벨로 적은 내용도 인식해 자동으로 식료품 목록에 등록한다.

"불필요한 식재료 중복 구매 줄었다"
식재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음식물 쓰레기를 실제로 줄일 수 있다. 비스포크 냉장고를 2년째 사용 중인 소비자 안모씨(44세)는 "예전처럼 용기에 일일이 포스트잇 라벨을 붙여 관리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남은 음식을 관리할 수 있어서 불필요한 식재료 중복 구매를 줄일 수 있고 음식물 쓰레기도 줄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장보러 가기 전에 냉장고를 잠깐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중복 구매가 크게 줄었다"고 덧붙였다.
식재료의 효율적인 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음식물 쓰레기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서울시교육청 산하 학교보건진흥원이 2020년 발간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매뉴얼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1만 3465톤으로 국민 1인당 음식물 쓰레기를 280그램 배출한다.
전체 음식물 쓰레기 중에서 먹고 남은 음식물은 30% 내외다. 그것보다 더 많은 음식이나 식재료가 유통·조리과정(57%)에서 버려진다. 보관만 하다가 결국 폐기되거나(9%), 하나도 먹지 않은 상태(4%)로 버려진다. '똑똑한 냉장고'는 이 지점에서 음식물 낭비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된다.

"에너지 사용량 최대 25%까지 절감"
냉장고는 음식과 재료를 신선한 상태로 보관하기 위해 계속 전기를 쓴다. 물론 아주 많은 전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에어컨이나 히터 등 냉난방기와 달리 방 전체가 아닌 내부 공간만 냉각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매우 크지는 않다.
대신 하루 종일 가동하기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 중에서는 비교적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기자가 사용하는 (AI 비스포크가 아닌 구형) 냉장고를 예로 들면, 2018년 4월 기준 1등급을 받은 국내 한 가전사의 320L 냉장고는 월간소비전력량 (제조사 소개 기준) 16.1kWh다. 전기세가 연간 3만 1,000원 정도 예상되고 이산화탄소는 시간당 9그램 배출한다.
최근 냉장고는 다르다. 신제품은 평소에는 컴프레서를 단독으로 운전해 냉각하고,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거나 강력한 냉각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반도체 소자를 함께 작동시켜 최적의 냉각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거나 내부 정리를 위해 문을 오래 열어두면 내부 온도가 올라가는데, 이럴 때 안쪽 온도를 일반 냉장고보다 빠르게 낮추는 방식으로 냉각 효율을 높였다.
삼성전자는 "AI 절약 모드를 설정하면 에너지 사용량을 최대 25%까지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가정에서 장시간 사용하는 냉장고 특성을 고려하면, 이런 절감 폭은 연간 전력 사용량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AI 가전이 실제 환경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기술 도입뿐 아니라 소비자의 사용 방식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술은 준비됐지만, 그 효과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AI 가전의 역할은 아직 진행형이다. 국내 환경단체 한 관계자는 "기술은 도구일 뿐, 환경 부담을 줄이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