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철길 지나 죽령옛길로…영주서 만난 봄날의 가장 근사한 걸음
마을길은 느긋했고, 폐철길은 멈춰 서게 했다
죽령옛길 오르자 달라진 숨결… 걷기에서 트레킹으로
주막의 막걸리 한잔까지, 영주 봄길이 여행이 되는 순간

풍기 인삼박물관 인근 마을길에서 시작해 희방사역의 폐철길을 지나 죽령옛길 숲길과 주막까지 이어지는 영주 동서트레일 41-1구간은, 걷는 재미와 쉬는 맛, 옛길의 정취를 한 번에 품은 봄 여행지였다.
영주 가흥동에 사는 이세동(35)씨는 최근 봄기운이 완연해진 날, 동서트레일 영주 구간 가운데 41-1구간 일부를 걸었다. 출발점은 풍기 인삼박물관 인근. 여행이라기보다 가벼운 산책쯤으로 시작한 길은, 걸음을 옮길수록 영주만의 풍경과 시간을 차례로 꺼내 보였다.
초반 길은 부담이 없었다. 마을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구간이 먼저 이어졌다. 집과 밭, 담장과 길섶의 풀빛이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 속에서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이씨는 "처음에는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며 "속도를 내기보다 주변을 보면서 걷게 되는 코스였다"고 했다.
길의 표정이 바뀐 것은 희방사역 부근에 닿으면서다. 지금은 쓰임을 다한 폐철길이 남아 있는 이곳은, 영주의 트레일이 단지 숲길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철로 위로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흐르고, 주변에는 오래된 역사의 기척이 남아 있다.
다시 마을길이 이어지고, 이내 죽령옛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한층 또렷하게 산길의 얼굴을 드러낸다. 숲은 짙어지고 흙길은 부드러워지지만, 정상으로 오를수록 경사는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숨이 찰 만큼 고되기만 한 길은 아니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의 굴곡이 오히려 트레킹의 재미를 살린다. 평지에서는 몰랐던 몸의 리듬이 살아나고, 숲길을 밟는 발끝에는 봄 산의 촉감이 전해진다.
이씨는 "초반에는 편하게 걸을 수 있었고, 산길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제대로 운동하는 기분이 들었다"며 "길이 계속 변하니까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영주의 이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풍경만 보여주지 않는다. 마을길의 느슨함, 폐철길의 정적, 옛길의 역사성, 산길의 호흡이 차례로 겹쳐진다.

죽령옛길의 매력은 단지 숲이 좋다는 데 있지 않다. 이 길은 신라시대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는 주요 통로였다. 예부터 선비와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길이었고, 사람과 물산, 소식이 오가던 통로였다. 지금은 트레킹 코스로 다시 다듬어졌지만, 걷다 보면 길이 품은 시간의 깊이가 은근히 전해진다.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래 밟아 만든 길'이라는 감각이 남는다.
이 여정의 끝에서 여행객을 붙드는 것은 의외로 소박한 풍경이다. 정상 부근 죽령주막이다. 나물전과 도토리묵 같은 향토 음식이 차려지고,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쌓인 숨을 내려놓기엔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장소가 없다. 이씨는 "정상에서 쉬며 막걸리까지 곁들이니 코스 전체가 더 기억에 남았다"며 "걷고 나서 맛보는 그 한잔이 여행을 마무리해주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영주시가 소개하는 동서트레일은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경북 울진 망양정까지 한반도를 동서로 잇는 총 849km, 55개 구간의 초장거리 숲길이다. 배낭을 메고 걷는 백패킹이 가능한 국내 첫 장거리 트레일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그 가운데 영주 구간은 총 20.56km로, 봉현면 두산리 국립산림치유원 구간과 풍기 일대 죽령옛길, 부석면 남대리 일원 등으로 나뉜다. 걷는 이들은 숲과 마을, 역사와 휴식을 한 코스 안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다.
특히 국립산림치유원 인근에는 백패킹 쉼터와 치유 프로그램이 연계돼 있어, 걷기 이후 머무는 여행으로도 확장된다. 우정필 영주시 산림과장은 "동서트레일을 중심으로 산림자원과 관광자원을 엮어 체류형 관광을 키울 계획"이라며 "걷는 사람을 잠시 스쳐 가는 방문객이 아니라, 머물고 쉬어 가는 여행자로 붙들기 위해 행정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기웅기자 zebo15@yeongnam.com